시작은 요란했으나 끝은 조용하다. 외관은 화려했으나 실속도 없었다. 올 여름 극장가는 '외화내빈'으로 요약될 만하다.
여름 시장이 열리기도 전에 충무로는 후끈 달아올랐다. 100억원대의 덩치 큰 영화 세 편이 출사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윤제균 사단이 제작한 두 편의 블록버스터 '퀵'과 '7광구'는 기대감을 부풀리기에 충분한 진용이었다.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오른 장훈 감독의 전쟁 블록버스터 '고지전'도 만만치 않은 위용을 자랑했다. 하지만 세 편의 영화는 손익분기점에 못 미치거나 겨우 손실을 피하는 정도의 흥행에 그쳤다.
실망스러운 것은 흥행 성적만이 아니다. 아무리 여름 영화는 팝콘 무비의 성향을 띤다고 하지만 올 여름 대작들의 깊이는 전반적으로 얕다. 사회를 향한 날 벼린 문제의식까진 아니어도 지금, 이곳의 세태에 대한 반영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 사회를 향한 풍자로 가득했던 '괴물'(2006)이나 5ㆍ18 민주화 운동을 다룬 '화려한 휴가'(2007), 우리 사회에 내재한 폭력성을 들춰낸 '아저씨'(2010)와 '악마를 보았다'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B급 정서로 똘똘 뭉친 '퀵'은 금방 휘발될 유머로 헛헛한 웃음만 불러낸다. 폭주족 때문에 피해를 입은 악당이 펼치는 복수극엔 비장미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7광구'는 어설프게 환경 문제를 건드리지만 이야기의 아귀를 맞추기 위한 단순 장치로만 활용한다. 바다에 줄을 지어 석유를 캐내고 있는 시추선의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마지막 장면은 요령부득이다. 개발연대에 대한 헌사인지, 환경파괴에 대한 경고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전쟁영화라는 찬사까지 들은 '고지전'도 아쉬움을 남겼다. 보수와 진보 진영의 갈등이 첨예한 시대 탓일까. 반전 메시지를 또렷이 제시하면서도 남북 병사가 우정을 나누는 비밀공간으로 도피하려는 퇴행적인 욕망은 유감이다. 그래도 '고지전'이 있었기에 올 여름 극장가가 아주 공허하진 않았던 듯하다.
439만명(28일 기준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을 모으며 여름 최고 흥행 영화에 등극한 '최종병기: 활'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단출한 이야기 구조가 오락성을 높이지만, 병자호란이란 시대적 배경의 의미를 현대로까지 확장하진 못한다. 준수한 스릴러 '블라인드'도 장르적 틀 안에서만 맴돈다.
충무로엔 의미나 재미 둘 중 하나만 있어도 훌륭한 성과라는 말이 있다. 의미와 재미 둘 다 가져가면 금상첨화라는 평가가 따른다. 올 여름은 의미와 재미 둘 다 갖춘 영화는 없었다. 유난히 지리멸렬한 올해 충무로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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