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4초 때문에.'
28일 오후 8시 40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남자 100m 결선을 앞둔 대구스타디움. 몬도 트랙 위에 모습을 드러낸 '인간 탄환' 우사인 볼트(25ㆍ자메이카)는 여느 때보다도 다소 들뜬 표정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익살스런 표정과 행동은 그만의 전매특허. 두 팔을 벌려 비행기 시늉을 했고, 허공을 향해 권투를 하듯 두 주먹을 번갈아 질러댔다. 이동 TV카메라가 5번 레인에 배정된 자신을 비추자, "정면만을 바라보며 달리겠다"는 뜻으로 피니시 라인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덥수룩한 턱수염과 머리카락을 매만지기도 했다. 극도의 긴장감을 풀기 위한 행동인데,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이런 화려한 쇼맨십이 전 세계 육상 팬들은 단박에 사로 잡았다.
'탕.' 4만 여명이 숨 죽이는 가운데 출발총성이 고요한 적막을 깨뜨렸다. 그러나 취재진과 관중 등 경기장은 이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볼트가 총성 전에 육안으로도 확인될 정도로 스타트 블록을 먼저 치고 나간 것이다.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인상을 쓰고 상의 유니폼을 갑자기 벗어 던진 이유도 스스로조차 부정출발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이번 대구 대회부터 한 차례 부정 출발의 경우라도 즉시 실격 처리하고 있다. 한국의 김국영(남자 100m)도 그랬다. IAAF가 8명의 출발 반응속도를 공식 분석한 결과에서도 볼트는 출발 총성이 울리기도 전에 이미 0.104초 먼저 스타트를 끊은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전광판에 실격을 뜻하는 'DQ(Disqualified)'가 뜨자 볼트는 손을 저으며 "누구 짓이야(Who is it)?"라고 외쳤고, 대구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관중석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3관왕과 세계기록(9초58)까지 작성했던 2009년 베를린 세계선수권에 이어 이번 대회에서 3회 연속 메이저대회 100m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으려던 볼트의 꿈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장면이었다. 더구나 타이슨 가이(29ㆍ미국)와 아사파 파월(29ㆍ자메이카) 등 라이벌들의 잇단 불참 속에 볼트의 우승은 이미 기정사실화 됐을 정도였다.
자신에게 화난 분을 좀처럼 삭이지 못한 볼트는 진행요원의 안내에 따라 출발선 밖으로 '퇴출' 당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의 굴욕적인 순간. 볼트는 트랙을 벗어나서도 경기장 벽에 양손을 치고, 통로 가림막에 머리를 기대는 등 허탈감을 주체하지 못했다. 인터뷰 없이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 나간 볼트. '실격 충격'으로 볼트가 남은 200m와 400m계주에서도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해 졌다. 최고의 흥행 메이커인 볼트마저 강화된 규정의 '희생자'가 되면서 가뜩이나 흥행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이번 대구 대회에 빨간 불이 켜지게 됐다.
대구=김종한기자 tell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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