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희(가명ㆍ50)씨는 일용직 남편이 벌어오는 월 100만~150만원의 수입으로 살림을 꾸리던 주부였다. 불안정한 소득 탓에 가사도우미로 나서야 할 때가 많았다. 정씨는 고민 끝에 2009년 5월 집 근처 아파트단지 인근 건물에 세를 얻어 반찬가게를 열었다. 음식 솜씨엔 자신이 있었지만, 허름한 가게 외양 때문인지 들어오려다 그만두는 손님들이 많았다.
그러던 중 2010년 초 가게 손님을 통해 신용등급이 낮은 저소득층에게 보증ㆍ담보 없이 저금리로 돈을 빌려준다는 '미소(美少)금융'을 알게 됐다. 대출 신청 보름 여만에 가뭄에 단비 같은 500만원을 빌렸다. 그 돈으로 음식모형 진열대를 제작했고, 눈길을 준 고객은 맛으로 사로잡아 단골을 만들었다. 지금 정씨는 20여 가정에 주문 배달까지 하고 있다.
은행들이 서민의 벗으로 거듭나고 있다. 현재 국민ㆍ우리ㆍ신한ㆍ하나ㆍ기업 등 주요 시중ㆍ국책은행이 취급 중인 서민대출 상품은 미소금융과 '새희망홀씨', '바꿔드림론' 등 다양하다.
이 가운데 대표주자는 저소득ㆍ저신용자 대상 소액대출(마이크로 크레디트)인 미소금융. 이명박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 속에 대출 규모가 큰 폭으로 늘고 있다. 올 들어 23일까지 대출금액은 1,597억원으로, 작년 전체 대출금액 796억원의 두 배가 넘는다. 월평균 대출액은 약 200억원으로, 역시 작년 평균(66억원)의 3배에 이른다. 이런 추세면 연말까지 2,400억원 가량 대출될 전망이다.
미소금융은 휴면예금과 은행ㆍ기업의 기부금 등을 합친 약 1조원 규모의 재원으로 2009년 말 출범했다. 신용등급 7등급 이하 저신용자도 연 4.5% 저금리로 담보ㆍ보증 없이 창업 또는 가게 운영자금을 빌릴 수 있다. 미소금융중앙재단 측은 당초 연간 대출 규모를 2,000억원으로 추정, 10년간 출연금 규모를 2조원으로 잡았지만 증가세가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
연체율도 그리 높지 않다. 6월 말 현재 미소금융 대출자의 31일 이상 연체율은 2.3%에 불과하다. 작년 말 기준 은행(1.9%)이나 카드사(1.3%)보다는 다소 높지만, 저축은행(10.6%) 같은 서민 금융회사에 비해선 훨씬 낮다. 중앙재단 관계자는 "무담보에 추심행위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까지 미소금융이 기록한 연체율은 상당히 낮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은행 자체 재원으로 운용되는 새희망홀씨 대출 실적도 늘고 있다. 작년 11월 출시된 새희망홀씨는 연 소득 3,000만원 이하 또는 신용등급 5등급 이하이면서 연 소득 4,000만원 이하인 저소득ㆍ저신용자에게 연 11%대 저리로 대출해주는 상품이다. 은행들은 전년도 영업이익의 10% 정도를 떼어내 서민신용대출인 이 상품의 재원으로 활용한다.
정부가 가계대출을 늘리지 못하도록 강하게 압박하는 가운데서도 은행권의 새희망홀씨는 지속적으로 공급되고 있다. 은행들은 올해 상반기(1~6월) 중 연간 목표액 9,326억원의 53%인 4,931억원을 취급한 데 이어, 최근 올해 대출 목표를 1조2,000억원으로 올려 잡았다. 출시일부터 25일까지 신한은행(1,386억원)과 우리은행(1,253억원), 하나은행(1,095억원), 국민은행(943억원) 등 4개 시중은행이 취급한 금액만 4,677억원에 이른다.
바꿔드림론은 신용도 낮은 서민이 대부업체나 카드사, 저축은행 등에서 빌린 고금리 대출을 연 8.5∼12.5%(평균 11%)의 은행 대출로 갈아타게 해주는 서민금융제도. 이를 활용하면 연 30% 이상 이자를 줄일 수 있다. 지원 대상은 신용등급 6등급 이하이면서 연 소득이 4,000만원을 넘지 않아야 한다. 대출 6개월이 경과했으면 연 20%가 넘는 고금리 대출 원금을 한도로 1인당 3,000만원까지 빌려준다. 6월 말 기준 이용액은 5,000억원을 넘어섰다.
최근 상생ㆍ협력이 강조되면서 중소기업 금융도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중소기업 지원이 설립 목적인 기업은행이 가장 적극적이다. 중기 대상 저리 금융은 물론 자연재해 피해를 입거나 긴급 자금이 필요한 기업에겐 특별금융도 지원한다. 올 추석을 앞두고 자금 조달에 곤란을 겪는 기업들을 위해 예년의 2배인 2조원의 특별자금을 책정했다.
중소기업의 지속 성장을 돕기 위한 컨설팅도 강화한다. 기업은행은 이달부터 2013년 7월까지 2년간 녹색ㆍ신성장동력, 문화콘텐츠 분야 중소기업 1,000곳에 경영과 기업 승계, 세무ㆍ법률 등과 관련한 컨설팅을 무료로 해줄 계획이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2003년부터 작년까지 8년간 누적 컨설팅 실적이 610건인 점에 비춰보면, 예년의 6배에 이르는 방대한 사업"이라고 소개했다. 기업은행은 이를 위해 컨설팅 전문인력을 현재 25명에서 55명으로 늘리고 담당 분야도 다양화할 방침이다.
다른 시중은행도 중소기업 지원 프로그램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정부가 선정한 녹색인증기업이나 우량 중소蓚殆?대해선 금리를 우대해주고, 위험 부담이 있는 비(非)우량 기업은 유동성 지원 프로그램 연장 등을 통해 회생을 지원할 계획이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돈벌이가 은행들의 지상 목표가 되면서 까다로운 중소기업 금융이 거의 고사했고 서민이나 빈곤층에게도 문턱이 더 높아졌다"고 비판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중소기업을 상대로 한 '꺾기'(은행이 기업에 대출을 해주면서 대출금 일부를 강제로 예금토록 하는 것) 관행이 여전하다"며 "이런 구태를 벗지 못한 중소기업 지원은 공염불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결국 은행이 시장 논리만 내세울 게 아니라 금융 소외자들을 끌어안는 한편, 돈이 생산적인 분야에 투자되도록 중개하는 공공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구인회 서울대 교수는 "시장 금융에서 소외된 서민들에게 시장의 칼날을 들이대선 안 된다"고 했고, 이필상 교수는 "산업금융을 활성화해 국가경제가 사는 게 은행도 함께 사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권경성기자 ficciones@hk.co.kr
■ 서민과 중기가 바라는 것
저소득ㆍ저신용자에게 손을 내미는 서민금융 상품(햇살론ㆍ새희망홀씨ㆍ미소금융 등)이 제 역할을 하려면, 취지에 맞는 대출 요건의 확립과 지속성 확보가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2009년 말 선보인 미소금융은 담보나 보증 없이 대출 신청이 가능하고 7등급 이하 저신용자도 돈을 빌릴 수 있는 상품이지만, 여전히 대출 요건이 엄격해 "돈 빌리기가 쉽지 않다"는 불만의 소리들이 나온다. 참여연대는 올 상반기에 낸 이슈리포트에서 "미소금융이 까다로운 대출요건으로 공익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현재 미소금융에서 대출을 받으려면 ▦창업자금의 50%를 미리 확보해야 하고 ▦보유재산 8,500만원 이하, 보유재산 대비 채무액은 50% 이하여야 한다. 또 사업자 등록 후 2년 이상 영업을 유지해야 운영ㆍ시설자금을 빌려주며, 프랜차이즈 창업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업종도 9개로 제한된다.
참여연대 측은 "이런 엄격한 조건 탓에 대출을 원하는 사람들 가운데 실제 본심사를 거쳐 대출을 받은 사람들은 미미한 편"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이 공익적 차원에서 저신용자에게 자활 기회를 주려는 취지로 상품을 내놓은 것이라면, 실수용자들이 제때 적정한 자금을 수혈 받을 수 있도록 요건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창업ㆍ사업 자금 마련 차 은행 문을 자주 드나드는 중소기업들은 은행들의 대출 평가기준이 달라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황영만 중소기업중앙회 정책총괄실 차장은 "은행들이 기업 평가를 할 때 돈을 돌려받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대출 담보나 신용보증서 등을 요구한다"며 "반면 기업의 미래 성장성과 기술개발 수준, 영업능력 등 질적인 평가는 간과하는 측면이 있어 영세기업들이 대출 받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기업의 신용을 평가할 때 단기 실적과 재무제표 등 눈에 보이는 수치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성장성 등 질적인 잣대를 개발해 평가에 접목해 달라는 게 중소기업들의 주문이다.
긴급 상황이 생겼을 때 서민금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서민들 입장에선 이런 상품들이 금세 사라지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서민들 사이에선 정권이나 정책 변경에 따라 미소금융과 같은 상품이 유행처럼 생겼다가 없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크다"며 "재원의 투입과 대출 요건의 지속성이 담보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은행들이 시대 흐름에 맞는 대출 상품을 빨리 만들었다가→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지면 슬그머니 대출 조건을 까다롭게 바꿔 서민들이 다가갈 수 없게끔 하고→그러다 보니 상품의 인기가 떨어져 아예 사라져 버리는 악순환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아름기자 s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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