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 미국의 한 마트에서 카드를 긁었다. 몇 년간 오직 특급호텔이나 레스토랑, 고급외제차 대여용으로만 쓰던 법인카드로 300달러어치의 잡동사니를 산 것이다. 이상징후를 알리는 사고예방시스템(FDS)을 들여다보던 위조카드감별사는 난감했다.
우리 시간으로 새벽 3시인데다 워낙 거물이라 본인에게 직접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 만약 카드가 위조됐다면 한도가 억대인지라 추가 피해도 예상됐다. 비슷한 사용내역이 있는지 문제의 카드를 샅샅이 살폈다. 판단이 서자 1분 만에 거래정지를 시켰다. 다음날 해당 대기업에 확인한 결과, 역시 위조카드였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이랬다. "아니 어떻게 회장님 카드를 맘대로 정지해!"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다.
위조카드 범죄는 신용카드를 쓰고 있다면 대기업 회장이라도 피해갈 수 없다. 개인정보 보호 탓에 말을 아끼지만, 위조카드감별사(카드사 신용보호 팀원)들은 피해를 당할 뻔한 유력인사들을 줄줄이 꿰고 있다. 이들의 방패가 없다면 결제망은 위조카드라는 창에 줄줄이 뚫릴 수밖에 없다.
위조카드감별의 달인으로 통하는 정연경(34) 신한카드 신용보호팀 대리를 만났다. 7년째 전쟁을 치르고 있으니 이골이 났을 터. 그러나 그는 "폭증하는 적들은 날로 영악해지고, 고객들은 여전히 오해하기 일쑤"라고 했다.
창의 진화
카드위조 범죄는 정보유출→위조카드 제작→물품 구매→환전으로 이뤄진다. 단계마다 총책과 판매담당, 행동책 등 복잡한 점 조직이라 검거를 해도 피라미일 뿐 핵심부는 마약조직마냥 베일에 가려져 있다. 워낙 방대한 카드 정보가 세계를 떠도니 거대조직이라고 추정만 한다.
정보유출 수법은 교묘하다. 제아무리 지갑 속에 꼭꼭 보관하더라도 카드를 꺼내 드는 찰나의 방심과 빈틈을 노린다. 주유소 직원에게 무심코 카드를 건네거나, 현금으로 계산하면 깎아준다는 말에 솔깃해 유흥업소 직원에게 카드를 잠시 맡기거나, 해외에서 결제하는데 여러 차례 카드를 긁는 행위를 소홀히 여기기만 해도 빌미가 될 수 있다.
각종 가맹점에 위장 취업한 조직원들은 고객이 한눈 파는 사이 담뱃값 크기, 최근엔 손톱만한 복제기(Skimmer)에 슬쩍 카드를 밀어 정보를 주르르 빼낸다. 위조카드의 영혼이랄 수 있는 정보들은 건당 9만~30만원에 거래된다.
최근엔 일대일 접촉보다 순식간에 다량 유출되는 해킹이 대세다. 인터넷용 PC에 깔린 가맹점의 포스단말기가 주된 표적이다. 지난해 이런 해킹이 두 차례나 벌어져 대대적인 교체작업을 하는가 하면 카드 부정사용 건수도 대폭 증가했다. 정 대리는 "예전엔 주로 해외에서 사용하다 정보가 유출됐는데, 최근엔 국내 유출 건수가 2009년 말에 비해 5배나 늘었다"고 했다.
유출 정보는 완전범죄를 위해 수년간 묵혀진 후 버려진 카드를 몸 삼아 위조(복제)카드로 둔갑한다. 이후 진짜 카드 주인이 가본 적도 없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걸리지 않는 한 결제한도를 죄다 털어먹을 때까지 활개친다.
방패의 고뇌
신출귀몰하는 위조카드지만 위조카드감별사 앞에선 꼼짝 못한다. 위조지폐감별사가 시각과 촉각에 의존한다면, 위조카드감별사는 일종의 두뇌싸움을 벌인다. 위조카드 사고 데이터를 분석해 유출 경로를 찾고, 사고 발생 때 신속하게 거래를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업계 1위 신한카드의 경우 1,540만장의 발급카드에서 매달 1억3,000만건의 거래가 이뤄진다. 이 중 약 43만건이 이상징후를 나타내며, 실제 위조카드는 900~1,000건 정도다. 7년 전 300건에 비하면 3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32명이 365일 끊임없이 교대로 지켜본다. 카드업계 전체로 따지면 매달 4,000건 가량의 위조카드 사용이 시도된다고 볼 수 있다.
워낙 방대한 양이라 눈 바짝 뜨고 거래 모니터만 들여다본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특정 카드의 사용 패턴을 분석해 이상징후를 알려주는 FDS는 위조카드감별사들의 무기다. 갈수록 진화하는 위조카드 수법에 맞서기 위해선 위조로 의심되는 복잡다단한 변수를 얼마나 촘촘히 FDS에 시시각각 입력해 놓느냐가 관건이자 위조카드감별사의 경쟁력이다.
예컨대 경유만 주유했는데 어느 날 휘발유를 결제했다든지, 카드 주인이 여성인데 룸살롱에서 쓴다든지, 평생 보석상엔 간 적이 없는데 갑자기 거액의 보석을 구매하려 했다든지, 1달러 등 상식 밖의 소액결제를 시도한다든지, 국내에서 사용한지 몇 분 안돼 유럽에서 긁는다든지(국가간 시차 거절) 등이다. 정 대리가 개발한 국가간 시차 거절 변수는 FDS의 히트 작품으로 꼽힌다.
FDS는 이상징후 경고만 보낼 뿐 최종 결정은 위조카드감별사의 몫이라 빠른 판단력도 필수다. 몇 년치 기록을 쏜살같이 살핀 후 1분 내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위조 여부를 최종 확인해야 한다. 덕분에 카드 위조나 변조에 의한 부정사용 건수는 매년 증가세지만, 그나마 2,000건(4,000억원대) 중반을 유지하고 있다. 위조카드는 99% 잡아낼 수 있지만, 패턴을 종잡을 수 없는 분실이나 도난카드 적발비율은 70% 정도라는 게 정 대리의 설명이다.
주로 미국 캐나다 유럽 등 선진국에서 위조카드 사용이 많아 밤샘 작업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지만, 위조카드감별사가 진짜 두려운 건 고객들이다. 애먼 지청구를 듣기 일쑤고 가끔 실수도 하기 때문이다. "이거 보이스피싱 아니냐", "너희가 해킹을 당해서 그런 거 아니냐", "내 카드 기록을 다 들여다보고 있는 거냐", "왜 동의 없이 거래정지를 하느냐" 등이다. 심지어 만취한 탓에 카드 위조 여부를 본인이 확인해준 사실을 다음날 까마득히 잊는 고객도 있다.
정 대리는 "여성 회원이 평생 안 가던 유흥주점에 갔길래 위조로 판단하고 전화했더니 '힘들어서 한번 왔다. 여자는 술도 못 마시냐'고 한참 꾸지람을 했다"며 "위조카드로 발생할 수 있는 고액의 금전 피해를 일선에서 막는다는 사명과 보람으로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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