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실의 달인' 되니 길 열렸죠
'달인' 김병만(37). 이 유쾌한 개그맨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궜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가 싫어, 아니 죽도록 미워 그는 반항의 언어들로 부모 가슴을 후벼파곤 했다. 그것은 부모에게도, 자신에게도 피 뚝뚝 떨어지는 생채기로 남았을 것.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이 붉어진다. 착한 그가 이런 일을 저지를 만큼 가난은 가혹했다. 빚더미 아버지, 식당일 하는 어머니, 봉제공 누나, 그리고 노가다 김병만. 이것이 젊은 시기의 그를 규정했던 가혹한 현실이다. 그러나 깊디깊은 아픔 속에서도 그는 화려한 꽃을 활짝 피워 냈다. 최고의 개그맨으로 저 높은 곳에 우뚝 섰다.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말하는 그가 성공을 위해 얼마나 간단없는 수고와 가슴앓이를 했겠는가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온다. 이 지난한 과정을 담은 자전적 에세이 (실크로드 발행)를 낸 김병만을 만나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들어 봤다.
_ 갑자기 웬 자서전인가.
"2009년 6월부터 2010년 1월까지 KBS1 TV '다 함께 차차차'라는 일일 드라마에 출연할 때 이응진(KBS 창원방송총국장) 당시 드라마제작국장이 내 팍팍한 인생사를 알고선 '책으로 펴내면 후배들에게, 또 나약해진 학생들에게 큰 지표가 될 것'이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그도 그럴 것 같아 있는 용기 없는 용기 총동원해 책을 내게 됐다."
_ 제목이 인데 어떤 뜻인가.
"참 고민 그득 담긴 제목이다. 산고 끝에 만들어졌다. 사실 개그맨 중에는 천재적 끼로 데뷔 때부터 객석을 빵빵 터지게 하는 사람 많다. 하지만 난 천재성 같은 것하곤 거리가 한참 먼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전략을 생각했다. 가늘고 길게 가자, 어떤 단역도 주저하지 말고 소명처럼 받들자, 그러나 쉬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성실 하나로 버텨 나름대로 성공한 개그맨이 됐다. 이런 성실과 성공의 함수관계를 이 제목으로 보여 주고 싶었다. 희망이 있으면 한 발씩 걸을 수 있고, 그렇게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으면 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거북이를 제목에 넣은 것은 토끼와의 싸움에서 이긴 진정한 승자이기 때문이다. 천재인 토끼는 여유작작하다 고꾸라지고 만 것 아닌가. 그래서 성실의 대명사 거북이를 내 평생의 애인쯤으로 여기고 있다."
_ 37세에 자서전은 속도위반도 많이 위반 아닌가.
"더 멋진 인생을 살아온 원로들도 많은데 이런 글을 쓴다는 게 죄송했다. 하지만 내 인생 절반인 37세를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내 개인에게 의미가 큰 반환점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꼬부랑 할아범이 된 뒤 쓰면 될 것이다."
_ 평소 글을 잘 쓰는가.
"내 수준에서 그냥 썼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기 정도라고 보면 된다. 대신 가방끈 짧은 독자들도 읽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점은 내 목숨 걸고 보장한다. 어려운 말로 하면 대중성이랄까. 사진도 크게 많이 넣었다. 책 읽기 싫어하는 사람도 한 쪽 한 쪽 팍팍 넘어가 지루하지 않게. 뭐, 비밀 아닌 비밀이지만 조각조각인 글을 얼개를 갖추도록 정리해 준 사람도 있다."(키득)
_ 얼마나 걸렸나.
"5, 6개월 전부터 준비했다."
_ 다른 개그맨들의 반응이 궁금한데.
"'표현이 진정 김병만답다' '쉬워서 좋다'는 얘기가 많다. 책을 30분 만에 독파하는 개그맨도 있었다. 이수근은 '너랑 나랑 살아온 현장이 겹쳐 책 소재가 똑같은데 네가 다 써서 내가 못 쓰겠다'고 하더라."
_ 좀 팔릴 것 같나.
"잘 팔리면야 더할 나위가 없겠지. 하지만 팔리는 거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이라도 더 읽어 내 인생에 공감했으면 좋겠다는 맘뿐이다."
_ 책에 보면 어린 시절의 최루성 사연이 듬뿍 담겨 있던데.
"고향인 전북 완주군에서 살 때를 떠올리면, 정말 비참했다. 가난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영농자금을 빌려 시작한 하우스 농사를 태풍으로 망치면서 완전히 기울었다. 당연히 온 집안이 빚더미에 올랐다. 어머니는 식당 허드렛일로 집안을 책임져야 했고, 누나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봉제공장에 다녀야 했다. 두 여동생도 비슷한 생활을 했다. 나도 고교 졸업과 함께 건설현장 막일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현장에서 일하다 4층 건물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가 19세. 그래서 어릴 때부터 키워 온 연기의 꿈을 위해 서울로 왔다."
_ 무작정 상경 이후 대학로에서도 '고난의 행군'을 계속됐다고 했다.
"연극도 제대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니 돈이 나올 구멍이 없었다. 라면 사 먹을 돈도 없어 라면 하나를 사골처럼 고아서 먹기도 했다."
_ 어머니 가슴에 대못 박는 얘기를 많이 했다는 내용도 있던데.
"당시 대학로에서 선배들과 연기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다가 시간이 지나 버스가 끊기면 택시비가 없어 그냥 마로니에공원에서 잤다. 그러던 어느날 술김에 어머니한테 전화를 해서는 '나를 왜 이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게 했냐'고 따지고 말았다. 엄청난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순간 어머니 반응은 '미안해'였다(김병만은 뜨거운 눈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가 나한테 욕을 했으면 조금 덜 미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미안해'라니. 그게 우리 엄마다."
_ 아버지에게도 그런 적이 있나.
"'왜 이리 작게 만들었냐'고 대든 적이 있다. 작은 키가 내가 개그맨으로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인데 정말 철없는 소리였다. 자신은 온전히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인데, 안 될 때마다 난 늘 그런 식이었다."
_ 일곱 번 고배를 마신 끝에 마침내 개그맨 공채에 성공할 수 있었는데, 뭔 조화인지 모르겠다.
"KBS 개그맨 공채에서 세 번, MBC 공채에서 네 번을 물먹었다. 그런데 여덟 번째 성공했으니 말 그대로 칠전팔기다. 이뿐 아니다. 백제대 방송연예과에 세 번, 서울예전 연극과에 여섯 번 탈락했다. 전주우석대 서일대 명지대도 떨어진 경험이 있다. 인생이 실패 그 자체인 셈이었다. 이수근과 노우진 같은 뛰어난 개그맨 지망생들과 함께 내 방에서 먹고 자면서 1년을 개그만 팠는데, 그러니까 개그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_ 개그맨이 됐지만 초반은 김병만 인생답게 여전히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사실 나는 로봇 같았다. 10개 가져가면 10개 모두 하려 했다. 객석 반응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데 그걸 무시했다. 그리곤 계산이 맞지 않아 객석이 싸늘하면 울렁증이 생겨 엉망진창을 만들었다. 그걸 극복한 것이 3년 전이다. 이젠 반응이 좋으면 한두 개 더 넣고 반대면 한두 개 뺀다. 무대에서 순간의 느낌에 따라 솔직한 애드립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도움이 됐다. 실수하더라도 한국 최고의 스펙을 가진 제작진인데 알아서 편집하겠지 하며 마구 저지른다. 후배지만 노우진은 이런 게 대단하다. 하루는 노우진이 갑자기 애드립으로 '너 오늘 행사 가지'라고 했는데 내가 못 받아 줘서 아무도 안 웃었다. 그런데 노우진이 한술 더 떠 '어 애드립으로 웃기려 했는데 안 받아 줘 못 웃겼네'라고 하는 것 아니가. 객석이 폭발했다. 나도 이런 쪽으로 강해지고 있다."
_ 책에 보니 최대 히트작인 KBS2 TV '개그콘서트'의 '달인'에 애착이 크던데, 3년 8개월 장수의 비결은.
"'달인'에 함께 출연하는 류담과 노우진 덕이다. 두 사람과는 10년 넘게 함께 생활하고 있다. 비밀이 있으면 가족에겐 못 털어놔도 이 두 사람에겐 다 얘기한다. 형제보다 더 가깝다는 말을 실감한다. 물론 같이 일하다 보니 가끔 다툼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뒤끝이 없다. 30분이면 미친놈들처럼 다시 헤헤거린다. 류담은 후배지만 마치 형같이 문제를 해결해 준다. 노우진은 분위기 메이커다. 기분 나쁠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_ '달인'의 성공 요인은 뭐라고 생각하나.
"사실 과거에도 비슷한 포맷의 코너들이 있었는데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이 코너를 제안했을 때 제작진도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꼭 하고 싶어 밀고 나갔는데 운 좋게 성공했다. 이게 잘 나가지 못했으면 난 1류가 되긴 힘들었을 것이다. 엄청 다행이다. 진지하게 나오다 갑자기 팍 망가지는 것이 내 모습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_ '달인' 이후 김병만 개그가 지향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달인'이 언젠가는 끝나겠지만 그후에도 팀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 다른 코너도 우리가 함께 할 수 있고, '달인'을 서로 역할 바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_ 책의 저자로서 스스로 밑줄 좍좍 긋고 싶은 대목이 있다면.
"서울 올라온 지 얼마 안 돼 어렵게 살 때 얘기 중 하나다. 당시 옥탑방 생활을 했는데 그 돈조차 마련하지 못해 방을 빼야 했다. 그래서 아는 형이 하는 무술체육관에 기거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게 됐는데 이곳에 샤워실이 없었다. 학생들이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며 뒹굴던 매트에서 자다 도저히 못 견뎌서 새벽 3시니까 아무도 없겠지 하고는 아래층 공중화장실에서 세면기에 물을 받아 놓고 목욕을 했다. 바로 그때 화장실 문이 드르륵 열리는 게 아닌가. 문에 자물쇠가 없었던 것이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관리인 아저씨였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로 시작된 꾸중이 10분 간 이어졌다. 여러분, 상상해 보라. 발가벗은 채로 10분을 야단맞는 모습을. 내 인생에서 그리 긴 시간은 없었다. 완전히 개그의 한 장면이다."
_ 책에 좌우명을 썼던데.
"'스스로를 성실과 노력의 감옥에 가두라'는 것이 내 삶의 지표다. 책을 쓰면서 새삼 그 중요성을 실감했다."
_ 지난 4일 행정안전부 직원 500명을 상대로 '유쾌한 도전과 성공'이라는 주제의 특강을 하고는 '강의의 달인'이라는 평도 받았던데, 강사로 직업 바뀌는 것 아닌가.
"말이 서툰 사람이라서 더듬더듬했는데 사람들이 졸고 있었던 모양이다. 히히."
_ 특강은 처음인가.
"중학생, 고교생들에게 강의한 적 몇 번 있다. 먼 훗날 멋있게 변해 있을 너 자신을 상상하라는 내용이었다."
_ SBS TV 서바이벌 프로그램 '김연아의 키스앤크라이'에서는 최종 2위에 올랐던데 놀랍다.
"온몸이 피투성이에 멍투성이인데, 잘하고 싶어 죽을 둥 살 둥 했다."
_ 결혼 시기가 꽉 차서 넘치는데 누구 없나.
"매일 새벽 2, 3시까지 이 짓을 하고 있는데 여자 만들 새가 없다."
_ 남의 스트레스 풀어 주는 직업인데 자신의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
"관객들이 웃는 것을 보면 모든 스트레스가 싹 가신다. 안 좋은 일이 있어도 모두 사라진다. 반대로 웃기기 위해 계획대로 연기를 했는데 반응이 별로 없으면 이건 왕 스트레스다. 하지만 요즘엔 잘 웃기기 때문에 정말 행복하다. 녹화 날이 기다려질 정도다. 스트레스 풀 일도 없다."
_ 앞으로 계획은.
"사실 나는 태권도 합기도 검도 등 여러 격투기를 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육체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방송사와 밀림에서 살아남기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다. 낫 하나만 있어도 잘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한다."
_ 팬들에게 한 말씀.
"나는 항상 먼 훗날 늙어서 공로상을 받고 후배들 앞에서 인사하는 나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 그래서 하루도 게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나태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채찍질이 바로 팬들의 응원이다. 팬들이 더 많은 박수를 보내 줬으면 한다."
■ 김병만은 누구
김병만은 대학로에서 탄탄한 연기력을 다진 개그맨이다. 연극에서부터 영화, 드라마, 연예프로그램까지 다방면의 활약이 돋보이는 엔터테이너다.
1996년 연극 ‘나 쫄병 맞아?’로 데뷔한 그는 2002년 KBS 17기로 개그맨이 돼 ‘달인’ ‘무림남녀’ ‘불청객’ ‘풀옵션’ 등 무술을 바탕으로 한 한국식 슬랩스틱 코미디(연기와 동작이 과장되고 소란스러운 희극으로 찰리 채플린이 대표 배우)의 새 장을 열었다. 이 인기를 바탕으로 ‘키스 앤 크라이’와 ‘출발 드림팀 시즌2’등 연예 프로그램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드라마 ‘종합병원2’ ‘아테나: 전쟁의 여신’ 등과 영화 ‘조폭 마누라 3’ ‘김관장 대 김관장 대 김관장’ ‘라듸오 데이즈’ ‘평양성’ ‘서유기 리턴즈’ 등에서도 개성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2009년 제45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예능상과 제21회 한국PD대상 코미디부문 출연자상, 2010년 KBS연예대상 코미디부문 남자최우수상을 받았다.
백제예술대 방송연예과와 동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건국대 건축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선임기자 leeeun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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