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다사다난한 해들을 겪을수록 정말 공감되는 격언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 한국인들의 급한 성정은 유명하지만 내 경우엔 좀 다른 차원에서 다급한 마음에 시달리곤 했다. 평소엔 별 일 없는데 다소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때때로 문제를 일으켰던 것 같다. 스케줄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평정심을 잃는 때가 많았다고 할까. 필요 이상으로 안달복달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날 정도였다. 고맙게도, 이런 '고질병'을 어느 정도 극복하게 된 계기는 실로 우연히, 그리고 아주 사소한 자리에서 찾아왔다.
벌써 7~8년 된 것 같다. 지인들과의 회식 자리였을 것이다. 거기 모인 멤버 대부분이 영화계와 대학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터라 화제는 자연스럽게 두 분야의 각종 이슈를 횡단했고 각자 자신의 애로사항을 털어놓기도 했다. 여느 친목모임이 그러하듯 거대담론과 미시담론이 치열하게 교차하던 와중에 내가 끼어들었다. "난 학교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정말 많아. 워낙 장거리라 도로 상의 변수도 많아서 도착 시간 예측하기도 힘들다 보니 일찍 나와도 늘 쫓기게 된다니까." 편도 8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출근길의 고단함에 당연히도 많은 이들이 공감했고 난 기분 좋게 위로를 받아들이려던 참이었다. 그때 중견감독 L씨가 아무렇지도 않게 몇 마디 툭 던졌다. "어차피 차 갖고 다니니까 드라이브 한다고 생각해. 사실 그렇게 억지로라도 외곽에 나가 다른 풍경 보는 것도 나쁜 건 아니잖아." 뒤엉켰던 실타래가 삽시간에 풀린 듯 했다. 이후 출근길이 아니라 드라이브라고 생각하고 운전대를 잡으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서울외곽순환도로나 고속도로 주변의 울창한 숲과, 구름으로 뒤덮인 나지막한 산자락도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2년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라 연구논문과 강의준비 때문에 역시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미국에 사는 남동생 식구들이 그즈음에 휴가 차 모처럼 한국에 온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론 반갑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은근히 걱정이 됐다. 내 머리 속에서는 세세하게 짜놓은 개인적인 마감 일정이 이미 줄줄이 꼬이고 있었다. 게다가 남동생과 조카들이 역동적인 활동을 좋아하다 보니 난 오래 전에 발길을 끊었던 워터파크, 수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가평 등지로의 가족 휴가 여정이 완성되고 말았다. 결국 몇 년 만에 만나게 된 남동생 가족에게 봉사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휴가였지만 막상 과격한 놀이기구들을 따라 타면서 평소 안쓰던 근육들을 사용하고 맘껏 소리를 내지르다 보니 놀랍게도 몸 안에 쌓여있던 독소와 모든 스트레스가 다 쓸려나간 기분이었다. 몸과 마음이 정화된 감정을 명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렇듯 신나게 놀면서도 느낄 수 있다는 걸 그때 새삼 깨우쳤다.
그리고 한 달 여 전쯤 한 케이블 TV 채널을 통해 나와 똑같은 체험을 하고 그 효과에 감탄하는 유명인들을 보게 됐다. 오지호 등 직종이 다른 유명 직업인 4명이 피자가게 창업을 준비하고 오픈하기까지를 담아내는 프로에서였다. 가장 바쁘고 예민한 시점에 접어들면서 갈등이 극에 달하자 고육지책으로 택한 것이 강제 휴식이었는데, 강물 위를 스치며 격렬하게 오르내리는 기구를 탄 일행 두 명이 체면도 잊은 채 비명을 질러대더니만 '기적처럼 모든 스트레스와 근심이 사라졌다'며 겸연쩍어 하는 인터뷰가 이어졌다.
요즘 난 옛날 버릇이 나오려고 하면 앞의 경험담을 되새기며 스스로를 추스른다. 시간이 모자라다고 생각될수록 억지로라도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를 가져보자. 장담컨대, 잠시 딴 짓을 해 보는 건 더 좋다.
김선엽 수원대 연극영화학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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