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노동당 225국의 지령으로 남한에 지하당 ‘왕재산’을 조직해 10년 넘게 간첩활동을 해온 일당의 전모가 드러났다. 이들은 1년 매출액이 수십억원에 달하는 IT업체를 세운 뒤 활동자금을 충당했고, 정치권, 노동조합뿐 아니라 국세청 관계자들도 포섭해 세력을 넓히려 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북한으로부터 2014년까지 인천지역 주요시설에 대한 폭파 지령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왕재산’ 사건을 수사해온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 이진한)는 국내에서 반국가단체를 조직해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총책 김모(48ㆍ대호명 관덕봉)씨, 인천지역책 임모(46ㆍ관순봉)씨, 서울지역책 이모(48ㆍ관상봉)씨, 연락책 이모(43ㆍ성남천)씨, 선전책 유모(46ㆍ성봉천)씨 등 5명을 구속 기소했다고 25일 중간수사결과를 밝혔다. 공안당국은 김씨가 북에 제출한 왕재산 조직도에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진보단체를 비롯, A지방국세청 관계자도 포함돼 있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총책 김씨는 93년 김일성을 만나 접견교시를 받은 뒤 지하당 구축을 모색하다 서울 소재 유명대학 주사파 출신인 임씨, 이씨 등과 함께 2001년 왕재산을 조직했다. 접견교시는 김일성이 간첩에게 직접 면담을 통해 내리는 공작지령으로, 간첩들은 이를 최고의 영예로 여기고 있다. 김씨 등 5명은 북한이 일정한 검증을 거쳐 부여하는 간첩 고유 명칭인 ‘대호명(對號名)’을 받은 이들로서 북으로부터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까지 받았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이들 5명의 간첩 활동은 은밀하면서도 전방위적이고 대범했다. 중국, 일본 등지에서 34회에 걸쳐 북측 공작원을 만나거나 컴퓨터를 통해 암호화된 지령문을 받은 김씨 등은 정치권 동향, 용산ㆍ오산 미군기지 및 주요 군사시설의 위성사진, 미군 야전교범 등을 북한에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인천지역을 혁명의 전략적 거점으로 만들고, 주요시설을 2014년까지 폭파 준비하라’는 지령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 관계자는 “구체적 개시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보병사단, 공수특전단 장교, 00지역방송국 직원 등을 매수하라는 구체적 지령을 받고 김씨 등이 활동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북한은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2005년 인천 문학산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저지, 부산 APEC 반대 투쟁 지령을 하달했고, 왕재산은 ‘관련 투쟁 집회를 성실히 주도했다’는 보고를 북측에 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북한이 왕재산을 통해 국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려 한 점도 밝혀졌다. 선거개입 지령을 받은 김씨 등은 국회의장 비서관으로 활동하던 이씨를 국회의원으로 만들어 정치권 상층부에 진입시키려 했지만, 공천이 무산돼 실패했다. 그러나, 북한은 지난 5월에도 진보통합정당 건설과 관련 ‘진보신당 내 통합 반대세력은 민주노총과 협공으로 통합으로 몰아세우고, 통합이 파탄될 경우 진보신당을 고사시켜라’는 내용의 지령문을 하달하는 등 국내 정치 개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왕재산이 장시간 은밀히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위장 IT업체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활동자금을 조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2년 전 북으로부터 ‘차량번호 인식시스템’ 핵심기술을 지원받아 국내에 지원넷을 만든 왕재산은 주차관제시스템 사업으로 1년에 2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검찰은 “김씨 등은 사업활동을 빙자해 빈번히 해외 출장을 나갔고, 이런 활동자금은 지원넷 사업비로 충당됐다”고 밝혔다.
한편,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연대는 “왕재산 사건은 레임덕과 정권교체 위기에 놓인 이명박 정권의 정국돌파용 사건으로, 온갖 과장과 확대,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권지윤기자 legend8169@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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