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의 아이콘
앨리스(Alice). 그냥 앨리스라고 부를 땐 보통명사와 같은 이름이지만, '~나라(랜드, land)의 앨리스'라고 호명되는 순간 앨리스는 상상과 현실을 관통하는 아이콘이 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수학자이며 논리학자인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다. 1865년에 쓰여진 이 동화 속의 주인공 앨리스는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60년대부터 전 세계적으로 수 많은 영화, 텔레비전, 라디오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되어 왔으며, 이 동화는 70년대 들뤼즈를 포함한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최고의 찬사를 보낸 철학적 텍스트이기도 했다.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앨리스는 컴퓨터 랜드와 각종 게임 랜드의 주인공으로도 지낸다. 책, 영화, TV, 게임, 장난감 등 현실세계와 한 없이 확장되는 가상세계의 주인공으로 계속 자리 매김하고 있다. 앨리스는 누구인가?
앨리스
51년에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 나온 앨리스는 푸른 원피스의 긴 머리 금발 모습의 소녀였다. 그 이후부터 성경 속의 예수님이 마치 긴 머리의 백인으로 각인된 것처럼 우리에겐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긴 머리 금발 앨리스로 남아있다. 동화 속의 실제 모델인 앨리스 리델(1852~1934)은 긴 머리의 금발이 아니라 검은 단발머리 소녀였다. 루이스 캐럴이 수학교수로 재직하던 옥스퍼드대 크라이트 처치 대학 학장인 리델의 어린 딸이었다. 하지만 검은 단발머리 소녀 앨리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빛 바랜 낡은 사진 속의 검은 단발머리 앨리스는 변형되어 금발의 긴 머리 앨리스로 상상력 아이콘이 되어있다. 가장 최근의 팀 버튼의 3D 애니메이션 영화 속의 앨리스도 긴 머리 금발이었다.
뉴미디어로서의 앨리스
긴 머리 금발의 앨리스가 세상을 누비는 상상력의 아이콘이 되고 있는 까닭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동화세계가 상상계이며 동시에 현실계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동화보다도 다층적, 비선형적, 무한 시공간을 열어 놓는다. 자유롭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되며 동시에 줄거리에서 자유롭게 빠져나올 수 있다. 그래서 다양한 예술콘텐츠인 문학, 미술, 무용, 연극, 영화, 미디어아트, 미디어 퍼포먼스 등 장르를 초월한 문화예술 표현의 출구로 활용된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에 의한 시공간의 확장으로 늘 새로운 문화예술표현의 원형이 요구되는 뉴미디어 환경에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하나의 화두가 되어 왔다. 사실 앨리스가 주인공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에 의해서 앨리스를 계속해서 불러내는 것이다. 앨리스는 예술과 테크놀러지를 융합하는 새로운 관점과 상상력을 불러낸다. 그리고 새로운 발상과 표현의 물질적 자원이 된다. 컴퓨터랜드의 앨리스, 퀀텀랜드의 앨리스, 버추얼랜드의 앨리스가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IT강국이라는 한국에서 뒤늦게 소프트웨어 강국을 만들기 위한 소란이 일고 있다. IT강국인데 소프트웨어 산업을 일구지 못했다니 참 이상한 나라인 것 같다. 끊임없이 변형되고 확장되는 뉴미디어 환경에선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비싼 물질이 된다. 그와 함께 콘텐트웨어와 아트웨어 역시 비싼 물질이 된다. 애플이나 구글이 소프트웨어 산업을 주도하게 되면 자연스레 콘텐트웨어, 아트웨어 산업도 지배하게 된다. 사실 이미 시작된 미래다. 이상한 나라엔 흰 토끼를 따라가는 앨리스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상상력을 통해 미래로 가지 못하고 오늘의 일용할 양식만을 찾아 나서는 이들은 앨리스가 아니다. 앨리스가 없는 이상한 나라엔 희망이 없다. 상상력의 아이콘인 앨리스와 같은 소프트웨어, 콘텐트웨어, 아트웨어들을 만드는 이상한 나라를 상상해 본다.
김형수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미디어아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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