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나를 발가벗긴다. 나의 남루, 결핍, 모순, 욕망, 질투, 설렘, 분노, 환희, 아픔…. 인간이 한평생 겪게 될 감정의 삼라만상을 우리는 대부분 연애를 통해 학습한다. 연애는 감정의 생로병사를 축약해 겪는 생의 압축적 체험이며, 이 체험을 통해 우리는 온통 발가벗겨진다. 연애라는 기제를 통해 자기 자신을 더욱 잘 알게 되는 것. 세상의 모든 빌둥스로망(Bildungsromanㆍ성장소설)이 연애담의 형식을 취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는 내 욕망의 특이함을 말해준다"는 롤랑 바르트의 말은 그래서 언제나 옳다.
2005년 최고시청률 52%로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은 코미디의 외피를 쓰고 이 같은 사랑의 본질을 천착한, 대중예술이 보여줄 수 있는 한 경지였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 눈앞 아득히 펼쳐진 남산 계단을 투닥투닥 다투며 올라가던 김삼순(김선아)과 현진헌(현빈)의 마지막 모습은, 무릇 인간이란, 이별의 습격에 맥없이 쓰러질지언정, 언제까지나 사랑하며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메타포인지도 모른다.
예술감독, 로맨틱코미디를 만들다
드라마 덕에 명소가 된 남산 계단은 사진 찍는 젊은 연인과 일본인 관광객들로 내내 붐볐다. 5년 만에 이곳을 찾았다는 김윤철 PD(현재 성신여대 미디어영상연기학과 교수)는 수줍고 멋쩍다고 했다.
그가 '김삼순'의 원작소설을 추천 받은 것은 2004년 9월이었다. 당시 데스크였던 김사현 CP(현 드라마2국 국장)가 "당신 같은 예술가가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한번 읽어봐" 하며 휙 던져준 게 지수현의 동명 하이틴 로맨스 소설이었다. 살짝 비꼬는 말투는 그 전 해 그가 단편드라마 '늪'으로 몬테카를로 TV페스티벌에서 최고작품상을 받으며, 본의 아니게 사내에서 '예술감독'으로 낙인 찍힌 탓이었다.
"사실 소설에 대한 편견이 없지 않았는데, 의외로 인물의 건강하고 생산적인 캐릭터가 좋았어요. 차기작을 함께 준비해온 김도우 작가도 보여주니 재미있다며 해보자는 반응이었고." 갈등구도를 위해 원작에 한 페이지 등장하는 진헌의 첫사랑 유희진(정려원)을 주인공급으로 키웠고, 6개월 후 첫 2회분 대본이 나왔다. 삼순이 역 0순위였던 김선아도 대본을 보곤 바로 오케이 했다. 로맨틱 코미디의 고루한 관습을 깨고 이 땅에 두 발 단단히 착지하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연애 이야기를 그려야 할 때라는 데 공감한 3인은 그렇게 드림팀을 이뤘다.
리얼리즘, 로맨스판타지와 만나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장르를 리얼리즘이라고 한다면 의아해 할 사람이 많겠지만, 엥겔스의 정의에 따르면 이 드라마는 리얼리즘에 적확히 부합한다. 엥겔스는 리얼리즘의 본질적 요소로 인물ㆍ상황의 전형성과 더불어 세부의 진실성을 꼽았다. 덩치가 산만한 서른 살의 고졸 노처녀가 세 살 연하의 미남 재벌로부터 사랑 받는다는 허황한 줄거리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는 이를 설득하는 건 서사의 리얼리티가 아니라 차곡차곡 쌓아 올린 디테일의 그럴듯함이다. 섬세하게 구축된 감정의 리얼리티, 사소한 소품 하나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 공간과 미장센의 리얼리티, 생생한 일상 묘사와 언어의 리얼리티가 응축할 때 어떤 판타지 속에서도 리얼리즘은 폭발한다.
김윤철 PD는 영국식 로맨틱코미디를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고 했다. 전형적 장르물이지만 리얼리티로 충만한 워킹타이틀 스타일의 로맨틱코미디에 도전해볼 만한 때라고 생각했다. 지독하리만큼 하나하나 리얼리티를 재고 따졌다. 삼순을 파티셰라는 낯선 직업으로 설정하고 매회 5~10분은 실제 삼순이 밀푀유, 크로아상 같은 빵을 굽는 모습을 보여주며 노동하는 삶의 본질을 제시했다. 연기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입말만 쓰게 했다. 드라마 전 회를 통틀어, 심지어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에서조차, 목이 늘어난 낡은 면티에 벙벙한 반바지만 공수해다 입혀 김선아를 드라마 역사상 가장 후줄근한 여배우로 만들었다. 모두 리얼리티에 대한 강박적 집착 때문이었다.
'강북드라마', 강북의 공간성
눈 밝은 이들이라면 알아챘겠지만, '김삼순'에 등장하는 모든 장소는 단 한 곳(진헌이 운영하는 대치동의 프렌치 레스토랑 '본 아페티(Bon Appetit)')을 빼놓고는 모두 강북이다. 삼순이 이혼한 언니(이아현), 홀로 된 엄마(김자옥)와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부암동의 마당 딸린 오래된 단독주택, 크리스마스 이브 남자친구의 외도 현장을 덮치려는 삼순과 맞선에 끌려 나온 진헌이 처?만나 아웅다웅 다투던 시청 앞 플라자호텔, 데이트 아닌 첫 데이트를 하게 된 남산 케이블카와 계단, 술 마시고 함께 밤을 보낸 후 들른 청진동 해장국집, 희진과 헨리(다니엘 헤니)가 매운 낙지를 먹으러 간 무교동 낙짓집…. 모두 공간의 리얼리티를 최대한 살리고 싶다는 연출가의 의지 때문이었다.
"제가 경상도 시골 출신이라 그런지 서울 하면 강북이 생각나요. 그에 반해 강남은 박제된 공간이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 서울의 정취를 살릴 수 있는 공간은 결국 강북이에요. 청담동, 신사동 이런 곳들, 정말 평범한 사람들은 갈 일도 별로 없는 곳 아닌가요?"
김윤철 PD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진헌 때문에 맞선을 망쳐 화가 난 삼순을 진헌이 미안해하며 뒤따라가는 남산 언덕길 장면(2회)이다. "플라자호텔에서 시작해 남산 언덕길을 거쳐 케이블카와 계단에 이르기까지, 검은 투피스 차림의 삼순을, 반듯하게 양복 차려 입은 진헌이 따라오는 그 모습에서 평범한 회사원들이 수줍게 데이트하는 듯한 설렘이 느껴졌어요." 때는 신록의 연둣물이 올라오던 4월 말. 예쁘고 화려한 곳은 아니었다. 다만 봄이 피어나는 곳. "촬영하며 모니터를 들여다보는데 얼마나 마음이 좋던지…." 그래서 첫 데이트 장면의 이 공간은, 작가와 PD의 이심전심으로, 마지막 장면의 공간으로 다시 한번 선택됐다.
김삼순, 그녀는 예뻤다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여인이 백마 탄 왕자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김삼순'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평범하고 보잘것없다'는 캐릭터는 늘 대본 속 설정으로만 존재했다. 극중 '나는 너무 못났어'라고 자조하는 여배우, 우리 눈엔 여전히 예쁘고 화려하고 세련됐다. 물론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TV에서까지 누추한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으며, 못난 여배우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게 대중예술의 치명적 딜레마다.
김선아는 이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다. 뚱뚱하게 살찌운 몸매와 추레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진헌이 삼순의 어깨를 잡으며 "당신 매력 있어"를 외칠 때, 누구도 이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뽀얗고 통통한 볼과 삐죽거리는 도톰한 입술, 장난기와 눈물이 번갈아 스며드는 착한 눈매가 누구도 삼순이를 밉다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못났지만 사랑스럽다는 대본 속 지문을 그대로 구현, 결국 대중을 설득시켰다.
김윤철 PD는 그 이유를 김선아의 움직임에서 찾았다. "흔히 예쁘다고 하면 정적인 상태에서의 비례나 균형을 말하는데, 사실 아름다움이란 움직임에 있어요. 몸짓, 고갯짓, 손짓 같은. 옛말에도 자색보다 자태라고 하잖아요. 김선아는 그 동적 상태에서의 움직임이 참 예쁜 배웁니다."
김선아는 이 예쁜 몸짓을 통해 늘 조연의 몫이었던 골계미가 여성의 매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계약연애 조항에 따라 만난 진헌의 어머니(나문희)가 부모의 직업을 묻자 삼순이 '금융업'이라고 말한 후 "일수를 '살짝' 놓고 계십니다"라고 할 때 어깨와 손의 자그맣고 귀여운 움직임. 진헌에게 사랑 고백과 키스를 받고 볼을 부풀리며 쌕쌕 날숨을 내뱉을 때의 날것 그대로의 떨림 같은 것들. 웃게 하는 여자, 그늘을 걷어내 주는 여자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삼순은 여실하게 보여준다.
이 드라마에서 배우들은 이를테면 '자기주도연기'를 했다. 디렉터는 지시가 아니라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는 연출자의 철학 때문이었다. "김선아씨, 오늘은 어떻게 할 거야?" 묻는다. 그러면 처음에는 배우들이 당황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완벽하게 준비를 해오고, 자기 드라마라는 애착을 갖는다. 단 한번도 콘티를 짜오지 않은 적이 없는 지독하게 꼼꼼한 연출자와 자기 아이디어를 무궁무진하게 풀어내는 배우들. 김선아의 수많은 애드리브, '얼음왕자' 진헌이 예비장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래방에서 빨간 넥타이를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울릉도 트위스트'를 부르며 망가지던 예쁘고도 온기 어린 장면들이 이런 치밀한 계산과 조율을 통해 탄생했다.
여자도 욕을 한다, 섹스를 한다
'김삼순'은 여성을 욕망이 거세된 존재로 보는, 한국 문화의 여성에 대한 가장 견고한 편견을 깼다. 여자도 화가 나면 욕을 하고, 사랑하면 섹스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마치 그런 일도 있냐는 듯 뭉개온 기존 드라마 문법을 파괴했다. 삼순은 마음에 드는 맞선남을 보면 "오늘 이 분위기로 미끄러지는 거야" 독백하고, 진헌 때문에 가슴 두근거려 잠 못 이루는 밤엔 "난 너무 오래 굶은 거야. 그것뿐이야" 읊조린다. 화가 나면 "야 이 새끼야" "뻑이 간다, 뻑이 가"를 남발한다.
여성의 성적(性的) 자기결정권을 박탈한 기존의 공고한 드라마 문법을 언젠가 전복해야 한다고 작정한 작가가 깃발을 들면 PD와 여주인공이 한입처럼 같은 구호를 외쳤다. "저건 위선이야. 내숭이야. 음흉한 거야!" 섹스를 사랑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치환, 밝고 경쾌한 어조 속에 의뭉스럽게 배치한 이 드라마의 기술은 탁월하다. 보는 이들이 거부감 없이 이 저항을 공감하며 받아들인 것은 이 기술과 무관치 않을 터. 여성을 성적 주체로 당당히 내세운 이 드라마는 이후 수많은 학술논문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김삼순'은 영리하게도 쉬운 해피엔딩으로 거짓 위안을 주지 않는다. 삼순에게 왕자는 보내주었지만, 백마는 허락하지 않았다. 여전히 케이크 가게는 장사가 잘 안 되고, 진헌의 어머니는 결혼을 반대하고 있다. 아기부터 만들어 결혼 승낙을 받아보려는 작전도 삼신할머니가 도와주지 않는다.
하지만 삼순은 말한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안톤 체홉의 처럼, 실패해고 또 실패해도 끊임없이 사랑해야 한다고.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한다. 우리도 헤어질 수 있겠구나. 연애라는 게 그런 거니까. 하지만 미리 두려워하지는 않겠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열심히 케이크를 굽고, 열심히 사랑하는 것.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나 김삼순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때로는 TV드라마가 구원이 되기도 한다. '내 이름은 김삼순'은 그런 종교적 기능을 수행한 잊지 못할 드라마로 오랫동안 불현듯, 불현듯,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 드라마 속 명대사들
#남자친구의 외도를 목격한 삼순이 울며
"지금 내가 울고 있는 건 그 남자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뜨겁던 사랑, 그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믿어지지 않아서 운다. 사랑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걸 알아버려서 운다. 아무 힘도 없는 사랑이 가여워서 운다."
#진헌과의 사이에서 빠져달라는 희진에게 삼순이
"추억은 추억일 뿐이에요. 추억은 아무런 힘도 없어요."
#옛 애인의 약혼식을 보고 상처받은 삼순이 진헌에게
"아까 왜 울었어요?"
"내가 생각했던 영원한 사랑은 이 세상에 없구나 생각하니까 기가 막혀서요. 사람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고, 사랑도 변하고."
"그걸 이제 알았어요?"
#소주로 실연의 상처를 달래던 삼순이 환영으로 나타난 아버지에게 울먹이며
"나 신경질 나 죽겠어. 이제 남자 땜에 울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아버지, 서른이 되면 안 그럴 줄 알았다. 가슴 두근거릴 일도 없고, 전화 기다린다고 밤샐 일도 없고…. 아버지,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냥 나 좋다는 남자 만나서 가슴 안 다치게, 내 이 마음 안 다치게, 나 그냥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근데 이게 뭐야. 끔찍해. 그렇게 겪고 또 누굴 이렇게 좋아하는 내가 나는 내가 나는 너무너무 끔찍해. 죽겠어, 아주. 심장이,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 아버지."
#발을 씻겨주며 헤어지자는 진헌에게 희진이 울며
"그래. 지금은 반짝반짝거리겠지. 그치만 시간이 지나면 다 똑같애. 그 여자가 지금은 아무리 반짝반짝거려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된다고. 지금 우리처럼. 진헌아, 그래도 갈래?"
"사람들은 죽을 걸 알면서도 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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