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전 제작 확대·방영 시간 축소… 현실적 대책부터 검토해야
미국 지상파TV CBS의 인기 시트콤 '두 남자와 1/2'의 제작사 워너브러더스는 지난 3월 주인공 찰리 쉰을 해고했다. 여배우와의 추문, 폭행 사건 등에 연루돼 물의를 빚었던 쉰이 마약중단 치료를 위해 요양원에 들어가며 시트콤 제작 중단까지 불렀기 때문이다. 쉰의 기행은 평지풍파를 일으켰지만 예정된 방송이 나가지 못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예슬이 고작 이틀 촬영장을 비웠는데 바로 '스파이 명월' 결방으로 이어진 여의도와 달라도 너무 다른 풍경이다.
'미디어 천국' 미국과의 단순 비교는 무리이나 '생방송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배우 한 명의 거취에 따라 방송이 좌지우지되는 여의도의 현실은 지극히 후진적이다. 전문가들은 드라마 사전제작과 출연료 조정, 제작비 현실화 등의 대안을 제시하지만 현실은 간단치 않다. 방송사와 외주제작사들이 공생을 모색하며 조금씩 실천 가능한 개선 방안을 마련해갈 필요가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쪽대본과 초치기 제작 관행을 없애고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선 전작제(방송 전 드라마 전편 완성)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드라마를 미리 제작하는 것은 제작사에겐 도박이나 다름없다는 게 여의도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편성이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제작일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제작비도 약 30%가량 상승하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예 편성이 되지 못할 경우 손실은 고스란히 제작사가 떠안아야 하는 몫이다.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며 드라마의 방향을 결정하는 역동적 제작 문화의 장점도 무시할 수 없다.
일본의 '준사전기획 시스템'은 국내 제작사들이 모델로 삼을 만하다. 주 1회 방송 되는 일본식 미니시리즈는 절반 또는 3분의 2 정도를 미리 만들어놓고 첫 회를 방송한다. 박정란 작가는 "시청자들의 정서가 한 두 달 사이 바뀌기도 한다. 절반 정도 만들어놓고 방송을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밝혔다.
시청률이 좀 낮다고 조기 종영해 버리거나 고무줄 늘이듯 무리하게 연장 방송을 하는 현실도 개선이 필요하다. 시청률이 높거나 화제를 부른 드라마는 연장 방송보다는 속편 제작 등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나치게 긴 방송 시간의 축소도 적극 검토해볼 만하다. 국내 미니시리즈는 주 2회 방영에 회당 70분으로 장편영화 상영시간에 맞먹는다. 과거 50~60분이었던 것이 타 방송사 드라마가 끝나고 광고를 내보낼 시간에 몇 분 더 방송해 시청률을 올리는 편법이 동원되면서 경쟁하듯 시간을 야금야금 늘려온 결과다. 한 드라마 PD는 "방송시간은 10분 늘었지만 드라마 구성상 굵직한 에피소드를 더 넣어야 해 제작기간과 노력은 배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1회 방송시간이 중간광고 시간을 제외하면 46~48분이다. 무리하게 분량을 늘리다 보니 지상파 3사 전체 방송 시간 중 드라마가 차지하는 비중은 18% 가량이나 된다. 일본의 경우 드라마의 방송 시간 비중이 약 10%다. 짧고 굵게 방송하며 돈을 벌고 있는 셈이다. 백승혁 콘텐츠진흥원 선임연구원은 "국내 드라마는 방송 시간이 너무 길어 일본 등에 수출할 때 재편집해야 하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다. 시간 축소가 일단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송사가 제작비 대부분을 책임지는 제작비 현실화와 스타급 배우들의 출연료 조정은 이른 시일 내엔 넘기 힘든 높은 산이다. 방송사와 외주제작사가 공생구조를 마련해 조금씩 극복해 나가야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노동렬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5월 열린 '방송콘텐츠산업 상생협력 세미나'에서 "방송사와 외주제작사의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며 "방송사는 외주제작사와 3~5편 정도의 장기계약을 통해 반복거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제안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 "종편 출범하면 제작 환경 더 나빠질 것"
드라마의 제작 환경이 올해 말 종합편성(종편)채널이 출범하면 더 악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드라마 방영 채널의 증가는 연기자들에게는 호재지만 방송사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치열한 시청률 경쟁의 격화를 의미한다. 최근 일부 종편과 케이블업계의 최강자 CJ E&M이 주축이 된 스타 PD 스카우트전에서 이적료 10억원이 우습게 거론됐듯이, 시청률 파워가 있는 정상급 연기자의 몸값은 더욱 치솟을 전망이다. 한 회에 수천만원을 받는 스타 작가들의 고료도 덩달아 뛸 것이다. 지금도 총 제작비의 절반 이상이 출연료로 들어가는 현실에서 몸값 경쟁이 과열되면 실제 제작에 돌아가는 몫은 더 줄어들게 된다.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씨는 "드라마 편성에서 캐스팅이 가장 중요한데 채널 증가로 캐스팅이 어려워지면 한예슬 같은 사건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며 "스태프의 처우나 제작 여건 등도 더욱 악화될 게 뻔하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국회에서 미디어렙법안 통과가 늦어지거나 종편 방송사들에 개별 영업을 허용할 경우 더 많은 광고를 끌어들이기 위해 시청률 무한 경쟁으로 치달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시청자들 눈을 붙들기 위해 '막장 드라마' 같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이 늘어날 가능성도 높아진다.
제작사들이 부족한 제작 비용을 충당하려 간접광고(PPL)에 매달리는 부작용도 우려된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최근 지상파 등 방송사업자에게만 허용되던 간접광고를 외주제작사에도 허용하는 내용의 방송법 개정안을 10월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방송계 관계자는 "지금도 드라마에서 간접광고가 노골적으로 나오는데 이제는 완전 개방되는 것"이라며 "시청자들이 느끼는 불편함도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