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크레이븐. 올해 72세인 미국의 노장 감독이다. 1990년대 '스크림' 시리즈로 한국에서도 꽤 많은 팬을 확보한 그는 71년 데뷔 이후 공포영화에 주로 힘과 시간을 쏟았다. 그의 대표작은 공포영화의 장르적 관습을 희롱하며 신선한 공포를 선사했던 '스크림'(1996)이다. 1,400만달러를 들여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1억7,300만달러를 전세계에서 벌어들였다. 난도질(Slasher) 공포영화로는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이다. 오랜 시간 공력을 쌓은 공포의 장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성과리라.
허리가 꺾이고 흰머리가 늘어나면서 피칠갑 영화를 멀리할 만도 한데 크레이븐은 올 여름 '스크림 4G'로 한국 극장가를 다시 찾았다. 예전만 못하다는 비판이 주를 이뤘지만 탄탄한 기본기는 여전하다는 평도 따랐다.
올 여름 충무로 공포영화들이 역시나 쓴 잔을 들이켰다.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와 '고양이: 죽음을 보는 두 개의 눈', '기생령' 등이 출사표를 던졌으나 오싹한 흥행 성적표를 받았다. 한 해 공포영화를 쏟아냈다가 흥행 참패를 맛본 뒤 이듬해 공포영화 씨가 마르는 최근 충무로의 유별난 제작 행태는 내년에도 반복될 전망이다.
한국에서 공포영화는 전형적인 기획영화로 규정돼 있다. 짧은 준비 기간과 촬영을 거쳐 비교적 적은 돈으로 '뚝딱' 만들어진다. 다른 나라에서보다 '저비용 고흥행'을 노골적으로 노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잘 치유되지 않는 충무로의 풍토병은 장르를 무시하는 제작 경향이다. 공포영화 마니아들은 꽤 있지만 공포영화에만 매달리는 감독들은 드물다. 올해 공포영화들도 공포와는 별 인연 없는 감독들이 메가폰을 쥐었다. '화이트'의 김곡ㆍ김선 형제 감독은 공포는 물론이고 상업영화와도 거리가 먼 독립영화계 스타다. '고양이'의 변승욱 감독은 멜로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2006)로 데뷔했다. '기생령'의 고석진 감독 영화이력도 공포와는 맞닿지 않는다.
감독들의 성향 때문일까. 세 영화는 비뚤어진 아이돌 문화와 유기 동물 문제 등 사회적 비판에 방점을 찍는다. 공포영화의 장르적 특질을 꿰뚫는 능숙한 연출 솜씨는 언감생심이다. 여름 관객들이 극장에서 소름 돋는 서늘한 경험을 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크레이븐 같은 달인의 솜씨를 바라지도 않는다. 무서운 영화의 특성을 잘 알고, 관객의 무서움도 아는 공포영화 전문가의 손길이 충무로엔 절실하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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