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파리 시장이 주최하는 영화 행사 파리 시네마 인터내셔널에서 나의 회고전을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뭐를 상영 할 거냐?"하니 "'죽음의 다섯 손가락'과 '노다지'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 '황혼의 검객' 등을 상영한다"고 했다. 참석요청까지 해왔다. 프랑스, 그것도 파리에서 내 회고전을 한다는데 왜 가지 않겠는가.
그 해 7월. 파리에 도착한 다음날 개막 행사에 참석했다. 1,600개 가량의 좌석이 있는 고전적인 대형극장에 레드카펫이 깔려있었고 기자들이 인터뷰하는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객석으로 들어가 앉으니 옆에 프랑스의 유명 여배우 카트린느 드뇌브가 있고 다른 쪽에는 '플래툰'(1986) 등의 올리버 스톤 감독과 다큐멘터리 '화씨 9/11'의 마이클 무어 감독이 앉아 있었다.
사회자가 뭐라고 프랑스어로 진행하니 스포트라이트가 나에게 향했다. 드뇌브가 박수를 치면서 자꾸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어리둥절하며 일어났더니 모두 박수를 치고 옆에 있던 스톤과 무어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아, 나는 다시 이렇게 영화감독의 자리로 돌아오는 구나.' 만감이 교차했다.
파리 시네마 회고전 때 관객의 환호와 열광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객석 1,000여석이 모두 매진되어 재상영을 하는 등 뜨거운 반응이 있었다. 특히 흑백영화 '황혼의 검객'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중 우리나라 민족의상의 색상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얘기하던 관객 등 적극적이고 지적인 관객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50대로 밖에 안 보이는 데 은퇴는 너무 이르신 거 아니냐는 말에 기분이 좋았는데 뒤쪽 좌석에서 한국 노인 한 명이 손을 번쩍 들더니 프랑스 말로 "지금 감독님 연세가 어떻게 되셨습니까?"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나도 모르게 대답을 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진행자가 "아, 감독님 그러면 은퇴할 나이도 되셨군요"하니 장내가 웃음바다가 되고 박수가 나왔다.
우리나라에선 은퇴 시기가 앞당겨지는 걸 빗대어 말한 '사오정'(45~50대에 정년퇴직)이니 '오륙도'(50~60이 되어서도 정년퇴직을 하지 않으면 도둑놈 소리를 듣는다는 비참한 말), '625'(62세까지 회사에서 일하면 오적)등의 은어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그 놈의 나이가 문제시 되고 있는 듯해서 서글프다.
TV 프로그램도 10대가 좋아하는 아이돌 중심이니 어르신들은 눈 둘 곳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요사이 그 반발 효과로 '나는 가수다' 같은 프로그램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 먹은 사람들을 위한 영화도 문화도 워낙 척박해 지다 보니 그 목마름이 극에 달한 것이다. 그렇다고 나이 먹은 사람들이 대접 안 해 준다고 징징거리고 신세한탄만 하고 있는 것도 꼴불견일 것이다. 나이 먹음은 삶의 지혜에 대한 내공, 그래서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뭔가 해 줄 수 있는 깊은 경륜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원로 영화인 대접을 받게 되었으나 한편 마음 편하지는 않다. 선배가 후배한테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시대착오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배가 후배한테 뭘 해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로스앤젤레스 한국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하면서 사비를 털어가며 영화제를 개최한 것도 후배들에게 뭔가 남기고 싶어서였다. LA는 세계 영화의 중심지 할리우드가 있는 최적의 영화산업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가 세계화하기 위한 교두보로 활용될 수 있는 영화 산업적 활동이 별반 없어왔다. 난 LA 한국국제영화제가 몇 년만 잘 버티면 한국영화가 세계로 뻗어가는 베이스캠프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한국정부의 반응이 냉랭했다.
부산영화제에서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의원들과 조찬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영화제 지원 요청을 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조찬을 한다고 기습 연락을 받고 참석해서 무대책과 상실감에 심히 불쾌한 적이 있었다. 더구나 그 자리에 참석한 몇 명은 나와는 달리 사전에 연락을 받고 자신들의 행사에 대한 자료를 제대로 준비 해 와 성공적인 지원 제안을 할 수 있었던 심히 불공평한 자리였다. 한국영화의 어려움을 타개하자는 자리였으나 정작 LA한국영화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무기력해지는 내게 스스로 화가 났다.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정말로 한국영화에 대해 애정과 관심이 있다면 회의가 끝나고 개인적으로 질문과 격려와 인사를 할 수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수고했다는 인사치레도 없었고, 연구해보고 방법을 찾아보고 도와주겠다는 관심도 없었다.
결국 2004년 제1회 LA한국영화제의 정부지원금은 정부에서 형식적으로 지원해준 3,300만원과 문화원 지원금1,200만원이었다. 다른 영화제에 억 단위 지원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궁색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정부에서 도와준 액수만큼 내 사재를 털어 영화제를 진행한 이유는 이 영화제가 한국영화의 세계화와 미국 내 한국인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데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선봉에는 문화가 있고, 특히 LA에서는 영화가 가장 효과적이다.
영화제에 선의를 베풀어줄 사람도 있다. 이 지면을 빌어 꼭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LA에서 막일을 하는 한 한국 노인이 찾아와서 단지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리고 한국영화제가 LA에서 열리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 때문에 후원금을 내겠다며 고생으로 비틀린 손으로 돈을 내밀었을 때 가슴 한편이 뻐근했었다.
또 한 외국인은 스태프들에게 저녁을 사주면 안 되겠느냐는 제안을 해서 어리둥절한 적이 있다. "한국영화는 잘 모르지만 한국영화를 소개해 줘서 고맙다"며 "작은 성의로 스태프들에게 저녁대접을 해주고 싶다"고 그 외국인은 말했다. 그 날 우리 16명의 스태프들은 정성 가득한 햄버거 파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은 햄버거 파티에 대한 감사의 기억으로만 영화제를 이끌어 갈 수는 없다. 초창기 약 5년간은 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만 한다.
올해 초 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안타까운 죽음을 전해 들었다. 후배 감독이 생활고로 자살한 소식도 접했다. 죽거나 죽지 못해 살아내며 버티거나 생명을 저당 잡히며 오직 영화에 대한 열정 하나로 이 척박한 한국영화현실 속에서 생존하는 영화인들로 인해 마음이 아파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영화산업의 이윤은 일부 스타 배우들에게 집약되고 대다수 스태프들은 최저생계비도 못 미치는 수입으로 말 그대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 우리 영화 정책은 아직도 미로 속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극장 수입 중 원천징수를 하고 있는 영화발전기금이라는 국민의 혈세도 영화진흥정책에 제대로 사용되고 있지 못하다. 저예산영화와 독립영화 등 열악한 환경에 내동댕이쳐진 스태프들은 한국영화 발전과 세계화를 위해 목숨을 내 놓았지만 정부는 엉뚱한 곳에 혈세를 낭비할 뿐이니 통탄할 일이다. 한국영화의 세계화라는 것은 기실 스태프들의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는, 합리적 시스템 하에서 제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영화 인생엔 여러 가지 어려운 고비도 있었고 화려한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내 자신이 영화를 했다는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를 하지 않았으며 보람을 느끼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또 영화를 할 것이다. 영화는 내 생명이고 천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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