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8월 2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 로터리. 바리케이드를 향해 질주하던 태화여객 시외버스가 가로수를 들이 받고 멈췄다. 이어지는 수류탄 폭발소리와 함께 버스는 화염에 휩싸였고 버스에 타고 있던 군인 대부분과 민간인 승객 몇 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복부에 관통상을 입은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 살아남은 김종철 전 공군 소위는 몰려든 기자들에게 "직속상관 이외엔 아무 말도 않겠다"며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곧바로 숨졌다.
2003년 논란 속에 개봉한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가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진 날이다.
68년 김신조가 이끈 북한의 특수부대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1ㆍ21 사태에 분노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주도하에 실미도 특수부대를 만들었다. 68년 4월 창설돼 684부대로 불린 이들은 김신조 특공대와 똑같은 31명으로 구성됐고 북한에 잠입해 김일성을 죽이는 것이 창설 목표였다. 국가를 위해 충성하고 임무를 완수하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단 3개월 만에 북파가 가능한 '인간 병기'로 탈바꿈할말만큼 기간요원과 훈련병 모두 사기가 하늘을 찔렀었다.
3년이 넘도록 지옥 같은 훈련이 계속됐지만 예정됐던 북파 계획은 취소되고 실미도 밖의 상황은 남북 화해 분위기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새 중앙정보부장이 된 이후락은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해 평화통일 안을 천명했고, 이에 따라 실미도 특수부대는 그 존재 가치를 잃게 됐다.
대우에 대한 불만과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들은 탈출을 결심하고 행동에 나섰다. 68년 8월 23일 새벽, 훈련 중 사망한 7명을 뺀 24명의 부대원들은 순식간에 실미도 기간병들을 사살하고 칼빈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채 섬을 빠져 나와 인천 송도 앞바다에 상륙했다.
탈취한 버스를 바꿔가며 서울로 향하던 이들은 곳곳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마침내 서울 대방동에 이르렀다. 부대원들 4명이 위급한 상황을 대비해 수류탄 안전핀을 뽑고 있었고 버스가 가로수에 충돌하자 연쇄적으로 수류탄이 폭발했다. 이 와중에 목숨을 건졌던 4명의 부대원들은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이듬해 4월 형이 집행됐다. 생명을 잃은 부대원들 중에는 범죄자가 아닌 일반인과 공군 출신도 섞여 있었다.
비극으로 막을 내린 40년 전 오늘의 사건은 남북관계와 정치논리가 빚은 씻기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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