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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1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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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1년 뒤

입력
2011.08.2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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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시외버스를 타고 피난을 갔다 위조지폐를 만들던 사람들이 붙들려 갔다 내 아버지도 붙들려 갔다 삼촌은 전쟁터로 돈에 팔려 나갔다 나는 덜 늙은 할머니를 매달고 피난을 갔다

새끼 염소가 나를 구경하러 나왔다 ―저런 새끼 상관마! 밥상을 따로 차려 먹으며 염소네 식구들이 수군거렸다

나는 다시 피난을 갔다 누런 송아지가 나를 구경하러 나왔다 ―너, 100까지 쓸 줄 알아? 할머니는 자꾸 주저앉았다 밤마다 빗자루 귀신이 내 뒤를쫓아다녔다

● 작고 머뭇거리는 음성으로, 물기도 없이 말하면서 듣는 사람을 한없이 슬프게 하는 목소리가 있어요. 시인은 바로 그런 목소리의 소유자입니다. 돈이 너무 없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위조지폐를 만들고 삼촌은 전쟁터로 갔습니다. 할머니와 둘만 남은 아이가 이 집, 저 집 떠돕니다. 모든 상황을 이유와 논리로 설명하고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니 그래서 더 잘 알 수 있어요. 할머니를 매달고 간 그 집에서 아이는‘매애매애’ 응석을 부리는 또래의 새끼염소처럼 어리광쟁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친척집 식구들의 수군거림에 익숙해질 무렵 또 다른 집으로 피난갑니다.

아이들의 기싸움이란 그런 거죠. 그 애의 놀림에 대꾸하진 못했지만 사실 나는 200까지 쓸 줄 알아요. 그런데도 자꾸 무시합니다. 할머니 제발 주저앉지 마세요. 나는 할머니가 너무 무거워요.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아이가 훌쩍입니다. 말 없는 아이 대신 우리가 물어줍니다. 엄마, 엄마는 어디로 간 거예요? 우리를 정말 슬프게 하는 사람은 어디론가 꽁꽁 숨어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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