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은 선일까, 악일까, 아니면 둘 다 일까.
영국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인간은 선과 악이 뒤섞인 모순적 존재이며 바로 거기에서 개인의 고통과 사회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에서 선과 악을 떼어낸 다음, 각각을 극단으로 몰고 가면 인간의 정신 세계가 보다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의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 에는 한 사람이면서도 두 사람인 지킬과 하이드가 등장한다. 버젓한 의사 지킬은 도덕적 속박에서 벗어나 쾌락적인 삶을 즐기고자 또 다른 자신 하이드를 분리해낸다. 지킬이 부, 명예, 능력을 두루 갖춘 번듯한 신사라면 하이드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악의 화신 같은 존재다.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두 사람을 통해 작가는 선과 악의 감정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그 이중성은 모든 일에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킬박사와>
성격 불분명한 영국 폭동
영국 폭동을 보면서 영국인들이 이제 지킬을 포기하고 하이드를 선택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경찰 총격에 의한 흑인 남성의 죽음이다. 시민들이 그의 죽음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났지만, 어느 순간 이유 없는 폭동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들은 행인을 폭행하고 금품을 뜯고 상점을 약탈하고 집에 불을 지르면서도 딱 부러지게 정치적 주장을 하거나 정책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았으며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을 내놓지도 않았다. 참가자의 계층, 인종, 나이 등에서 뚜렷한 경향성이 없었고 사업가의 딸, 교직원, 올림픽 홍보대사까지 포함돼 있었다. 그래서 일부 언론은 그들을 혼재된 폭도라고 표현했다. 비슷한 시기 긴축 재정 반대라는, 분명한 요구를 내건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의 시위대와 분명 달랐다. 한 영국 노동당 의원은 "그들이 거대한 게임을 하는 듯 했다"고 꼬집었다.
지향점도, 구호도, 이유도 불분명한 폭동이기에 인간 내면에 웅크린 하이드의 본성으로 이해해 보려 했다. 도덕적 굴레 혹은 사회적 속박을 벗어 던지고 내면의 일탈적 욕구를 추종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만약 실제로 그런 배경에서 일어난 폭동이라면, 정치사회적 이유로 발생한 폭동보다 더 크고 심각한 과제를 던졌다고 할 수 있다. 이유와 요구가 분명하면 거기에 맞는 처방을 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해결책 찾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드의 본성이 아무 때나 집단적으로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조건 혹은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개인 차원의 비행이나 일탈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사회가 안정되고 건강하다면, 영국 폭동이 쉽게 전국으로 퍼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동체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약자를 보호하며 젊은 세대의 꿈을 존중하고 종교ㆍ신념ㆍ출신 지역의 차이를 인정하며 폭력이 없고 정의가 충만한 사회라면 하이드적 본성을 집단적으로,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이중성과 건강한 사회
<지킬박사와 하이드> 가 발표된 1886년의 영국은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전, 전세계에 걸친 광범위한 식민지로 생산성이 급속히 상승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빈부 격차의 확대, 불평등의 심화, 폭력적인 식민통치 등으로 사회 갈등이 급속히 커지고 있었으며 권력자 혹은 가진 자의 탐욕과 위선이 사회의 건강성을 짓밟고 있었다. 스티븐슨이 <지킬박사와 하이드> 를 통해 인간의 이중성을 고발한 것은 그런 사회적,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다. 지킬박사와> 지킬박사와>
인간은 이중적이다. 그래서 모순되는 감정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지킬이자 하이드다. 하지만 사회가 건강하고 정의롭다면, 그 구성원 다수가 쉽게 하이드의 유혹에 빠져들지는 않을 것이다. 영국 폭동의 교훈은 여기에 있다.
박광희 국제부장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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