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자 박탈감 해소… 비정규직 4대보험 등 구체적 계획부터"
"공생발전이 구체적으로 뭘 하자는 얘긴지 모르겠다", "공생과 어울리지 않는 MB노믹스의 기조부터 바꿔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생발전 제안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상당히 차가웠다. '다 함께 조화를 이뤄 발전하자'는 취지는 좋지만, 이에 맞는 구체적인 그림과 계획이 없다는 우려가 컸다. 전문가들은 공생발전을 위해 현 정부가 많은 것을 버리거나 바꿔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금의 승자독식 자본주의를 성장의 온기를 골고루 나누는 새 패러다임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MB정부 공생 수준은 49.9점
한국일보가 19일 공생발전과 관련해 국내 경제ㆍ경영학 교수 10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현재 우리 사회의 공정ㆍ공생발전 정도는 낙제점에 그쳤다. 10명 중 4명이 50점 이하의 점수를 줬고 최고 점수는 80점(1명)에 그쳐 전체 평균(49.9점)이 50점을 넘지 못했다. 권영준 경희대 교수는 "정상적인 자본주의가 붕괴 직전에 왔다"고 평가했고, 이필상 고려대 교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좀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기존 시장경제가 새로운 단계로 진화해야 한다"고 언급한 데는 1명을 제외하곤 모두 동의를 표했다. 이영 한양대 교수는 "컴퓨터의 발달과 세계화가 결과적으로 양극화를 부추겼고, 이제는 새로운 맥락의 자본주의를 모색할 때"라고 말했다. 박원암 홍익대 교수는 "현 정부가 강조했던 '성장을 통한 분배', 즉 낙수효과(트리클다운 효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공생발전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없이는 말잔치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많았다.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는 "자본주의의 기본요소인 기업의 이기심(이 대통령은 '탐욕경영'이라 표현)은 윤리와 보완적인 관계지 '탐욕 대신 윤리'식의 대체는 하기 어렵다"면서 "후속조치 없이는 또 다른 구호에 그칠 것"이라고 경계했다.
공생발전의 장애물은 MB노믹스
전문가들은 공생발전이 잘 안 되고 있는 원인을 대부분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병폐에서 찾았다. ▦양극화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시스템 ▦오랜 대기업 중심의 성장전략 등이 우선 꼽혔다. 여기에 "고속ㆍ압축성장 과정에서 '누군가는 특혜로 컸다'는 피해의식이 여전해 늘 불공정하다는 인식이 더욱 커진다"(윤석헌 숭실대 교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지도층에 오르니 공생을 생각하지 못한다"(전성인 홍익대 교수), "서로 배려하고 나누는 문화가 아직 부족하다"(이영 교수) 등 심리나 인식적 측면의 약점도 지적됐다.
현 정부의 각종 정책 가운데 상당수가 공생이나 공정을 오히려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도 많았다.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총체적인 정책 실패"라고 단언했고, 이인호 서울대 교수는 "공생발전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제도를 만들고 있다"며 인사정책의 실패를 거론했다. MB노믹스의 간판 격인 감세정책에 대해선 5명이나 '공정 저해 요소'로 꼽았다. 이필상 교수는 "부자감세, 규제완화, 고환율 정책 등 현 정부의 대표정책들이 결과적으로 공정ㆍ공생을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생을 위한 문화ㆍ인프라 구축해야
공생발전을 위해서는 우선 약자의 박탈감을 키우는 현실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주문이 많았다. 권영준 교수는 "재벌들이 떡볶이집, 레스토랑, 커피가게 등까지 진출하는 현실은 큰 문제"라고 했고, 김원식 건국대 교수는 "적어도 4대 보험 혜택이나 사내 복지는 정규직과 동등하게 맞추는 등 비정규직 차별을 우선 해소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장기적으로는 공생을 위한 문화나 인프라 구축에 힘써야 한다는 지적이다. 강석훈 교수는 "공생은 정치ㆍ경제ㆍ사회 모두를 아우르는 문제인 만큼 이를 저해하는 법이나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영 교수는 "고용 친화적이고 기부를 독려할 수 있는 조세정책이 필요하며, 빈곤 사각지대를 메울 복지제도도 더욱 커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가적인 신성장동력에 중소기업을 주체로 활용하고 내수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대기업에게 지나치게 공생의 의무를 지우는 것은 오히려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대기업의 기본 역할을 재정립해 해외수출 시장에 주력하게 하고 국내 시장은 중소기업 위주로 가야 한다"(이필상 교수), "국가 차원의 배려를 바탕으로 성장한 만큼 걸맞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마땅하다"(윤석헌 교수)는 주장과 더불어, "책임을 권고는 하되 강요하지는 말아야 한다"(강석훈 교수), "투자나 고용을 강요하면 효과가 없으니, 알아서 하도록 격려하는 게 낫다"(이인호 교수)는 경계?목소리도 나왔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박민식기자
■ 재계의 공생 카드는
재계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공생발전을 새 화두로 제시하면서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도 높게 요구하고 있으나, 새롭게 내놓을 만한 '카드'가 마땅치 않아서다. 재계는 일단 공생발전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획기적인 대책 마련은 쉽지 않다는 분위기이다. 다만, 공정사회, 동반성장 등과 관련해 그간 약속했던 사항들을 제도화하고 이를 기업문화로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나간다는 계획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고위관계자는 19일 "공생발전론의 핵심은 산업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들자는 것 아니냐"면서 "그 동안 여러 기업들이 동반성장 협약을 맺는 과정에서 제시한 과제들을 성실히 이행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소금융재단 운영, 중소기업의 연구개발(R&D) 지원, 사회적 기업 육성, 납품단가 현실화, 고졸 신입사원 채용 등을 예로 들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정부는 이번에도 대기업들이 뭔가 액션플랜을 내놓길 바라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기업들이 색다른 묘수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내부적으로는 그간 협력업체와의 상생방안으로 제시했던 여러 대책들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는 데 주력하자는 의견이 많다"고 전했다.
이런 기류는 재계 스스로 그간 정부와 정치권의 주문에 충분히 화답해왔다는 판단에 기인한다. 2009년 4월 재보선 이후 이 대통령이 '친서민 중도실용'을 얘기한 뒤 주요 그룹들이 미소금융재단을 잇따라 설립했고, 올해 초 삼성그룹이 출연금을 500억원에서 1,000억원으로 늘리기로 하는 등 미소금융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냐는 것이다. 또 공정사회와 동반성장이 화두가 된 지난해부터는 많은 대기업들이 협력업체와 상생협약을 맺고 이를 평가 받기로 하는 등 "우리로서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재계 관계자는 "올해 초 청와대가 30대 그룹 총수들을 불러서 간담회를 한 직후 공정거래위원회가 일감 몰아주기에 대해 과세하겠다며 뒤통수를 쳤지만, 삼성은 소모성자재 구매대행(MRO)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했고, SK는 MRO를 사회적 기업으로 육성키로 하는 등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에 협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공생발전을 위해선 정부가 뭔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다. 자유기업원 관계자는 "규제완화를 얘기하면 대기업 특혜라는 비난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인력과 기술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에게 규제 완화가 훨씬 절실하다"면서 "중소기업의 운신의 폭이 넓어지면 대ㆍ중기 상생방안도 훨씬 탄력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정대 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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