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들에게 지난해 9월 29일은 특별한 날이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을 위해 촘촘한 그물망을 짜자는 상생대회가 열린 날이다. 관계부처 장관들과 기업인 100명이 참가한 이날 대회에서 대기업은 상생을 다짐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중소기업의 부당한 어려움은 없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 대기업 등쌀에 도저히 살 수 없다던 중소기업인들에게는 그래서 희망의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10개월 넘게 지난 지금, 국민들은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상생의 현장을 봐야 했다. 5시간 가까이 진행된 17일 국회 청문회 자리에서다. 중소기업의 어려움이 폭동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는 취지를 밝힌 중소기업중앙회장이나 현실을 조목조목 고발한 중소기업연구원 관계자에게서 상생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사실 상생이 필요한 현장 얘기는 나올 만큼 나왔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관계부처나 대기업은 지난해 7월 6일부터 23일까지 총 14회에 걸쳐 연재된 '양극화, 대한민국이 갈라진다'는 한국일보 기획기사를 꺼내 볼 필요가 있다. 납품단가 후려치기, 기술 탈취, 경영 간섭 등에 숨막혀 죽겠다는 중소기업의 하소연이 생생히 고발돼 있다.
한 치도 나가지 못한 9ㆍ29대책
그러나 최근 동반성장 문제가 다시금 화제로 떠오르자 전해오는 기업인들의 제보를 들어보면 개선은커녕 뒷걸음질한 것이 분명하다. 새 기술을 적용한 부품을 납품하자 원청업체가 다른 하청업체에 똑같이 만들도록 한 뒤 단가 인하를 압박하고, 신규상품용 라인을 설치하라고 주문해, 없는 돈 수억원 들여 갖춰놨더니 계획을 취소하는 바람에 돈만 날렸다고 하소연이다.
일일이 거론하기도 어렵지만 목표보다 많이 나온 이익을 잠시 맡아달라는 원청업체의 주문까지 받았다는 제보에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일부의 잘못이 확대됐다"는 전경련회장의 청문회 발언처럼 대기업들이 다 그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난해 9월의 대대적인 상생대회 취지와 구체적인 정부대책이 실종된 것만은 분명하다.
9ㆍ29대책에서 정부는 세세한 방안들을 내놨었다. 납품단가 조정 신청권, 구두발주 금지, 기술자료 전문기관 보관제, 부당한 경영간섭 방지, 징벌적 배상제 도입 등 크게 분류해도 39개 분야나 된다. 이대로만 실천된다면 상생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어서 중소기업인들이 희망을 얘기할 만 했던 것이다.
상생선언 1년이 다 되도록 아무런 진전 없이 말뿐인 대책으로 전락하고 만 데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대기업의 책임을 먼저 말할 수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사실 정부에 있다. 청와대만 해도 당시 경제수석을 반장으로 지식경제부 공정거래위원회 중소기업청 등 관계 부처의 차관급이 모여 매달 동반성장 추진상황을 점검해 대통령에게 보고하겠다고 해놓고 단 한 차례 회의를 열지 않았다. 동반성장위원회도 만들어만 놨지 주요 업무라고 내세운 지수 개발이나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을 놓고 6개월 넘도록 입씨름만 하고 있다. 그나마 지경부와 공정위 중기청이 공동으로 사이버지원센터를 구성해 지방조직까지 갖추고 있으나 제대로 된 처리실적을 아직은 찾아볼 수 없다.
공생발전, 말로만 되지 않는다
기존 법과 규정만 정부가 제대로 실행해도 상생의 80%는 정착된다. 하도급법이나 상생법을 법대로 지키도록 하고, 공정위가 막강한 각종 조사권을 발동해 규정대로 조치하면 문제의 상당 부분이 해결되는 것이다. 국회 역시 관련 법을 점검하고 보완법을 만드는 등 국회답게 나서야 한다. 대기업을 윽박질러 중소기업에게 뭔가를 넘겨주겠다는 제로섬 게임식 발상을 상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상생의 핵심은 대기업 죽이기가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건강한 동반성장인 것이다.
정부나 정치권이나 심판자로서 규칙을 만들고 경기를 관리해야지 직접 뛰겠다고 나서면 혼란만 있고 골은 나지 않는 경기가 되고 만다. 내년 광복절 경축사가 또 다시 공정사회, 공생발전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
이종재 논설위원 jchong77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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