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기침을 하면 시중은행들은 독감에 걸린다. 숫자를 꼭 집어서 대출을 자제하라고 지시해놓고는, 하루 만에 말을 뒤집어 필요한 사람에게는 해주라는 데, 어는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 한 시중은행 간부의 하소연이다. 금융당국이 일부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중단에 따른 창구 혼란을 은행의 과민대응 탓으로 돌리는데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무성하다.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19일 시중은행들의 대출 규제 움직임과 관련, "전면 중단해선 안 되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는 대출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권 원장은 이날 오전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기자들을 만나 "불요불급한 대출은 자제해야겠지만 꼭 필요한 사람에게는 대출이 이뤄져야 한다"며 "은행이 잘 대처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적정 경제성장률 내에서 가계대출이 과도하게 늘지 않도록 지도하는 방향은 유지된다"며 "앞으로는 월별로 각 은행 지점에 세밀한 운용기준을 만들어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권 원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은행 창구는 다시 열렸다. 가계대출을 전면 중단해 원성을 샀던 농협은 "꼭 필요한 사람에게는 대출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단위농협에 보냈다"고 말했다. 신한, 하나, 우리은행 등도 "심사를 강화한 것일 뿐, 가계대출을 전면 중단한 것은 아니다"면서 "서민 대출이나 전세자금 등 실수요자 대출은 계속 하고 있다"고 밝혔다.
금융당국은 시중은행들의 대출 제한이 지침을 잘못 해석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앞서 18일 오후 김석동 금융위원장과 권 원장은 국회 정무위에 출석, "가계대출 증가율을 전월 대비 0.6%이내로 관리하라는 행정지도를 했다"면서도 "시중은행들에 가계대출이 지나치게 늘지 않도록 부탁한 것이지, 그렇게 급격하게 줄이라고 한 의도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은행권에서는 대출 증가율을 전월 대비 0.6% 이내로 맞추라고 요구했던 금융당국이 문제가 불거지자 다시 대출해주라는 것은 '병 주고 약 주는 식'이라는 볼멘 소리가 나온다. A은행 관계자는 "감독당국은 부탁이라고 하는데, 그걸 '부탁'으로 받아들이는 은행은 없다"며 "은행 영업의 기본인 대출을 줄이는 이유가 부탁 때문이겠느냐"고 반문했다. B은행 관계자도 "대출을 받으려는 고객 중에 필요 없이 받는 사람도 있느냐"며 "대출을 늘리지도 말고 중단하지도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하라는 건지 답답하다"고 말했다.
오락가락하는 당국 지침에 은행들은 눈치를 봐야 하는 실정이어서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 몫이다. 돈을 빌릴 수 있는 길이 좁아진데다 이자 부담까지 안아야 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은행들이 대출을 최소화하면서 평소 대출 이자를 할인해 주는 '특별승인(특인)'도 사라졌다. 모 은행에서 상가를 담보로 5억원을 대출받았다는 C씨는 "지난주 상담할 때 은행 측이 제시한 대출 이자는 5.7%였는데, 불과 일주일 만에 7.1%로 뛰었다"며 "급전이 필요해 어쩔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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