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는 가정에서 고개 숙인 존재다. 그것도 푹. 가족 가운데 누구도 남자를 대접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심하게 말하면 그냥 없는 거나 다름없는 존재다. 과거 아버지들의 가부장적 권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서의 존재감 말이다. 그래서 한국 남자는 더 슬퍼진다. 더 외로워진다.
지난달 말 EBS TV를 통해 방송된 '자유발언'의 '가장이 고함' 편은 한국 남자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한 20대 가장의 얘기.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가 밥도 안 해 줍니다. 정말 이럴 줄 몰랐어요." 사실 한국 남자는 결혼하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아침에 부인이 김 모락모락 솟는 밥 한 끼 차려 주길 바란다. 아침밥은 한국 남자의 로망인 셈이다. 막 결혼한 20대는 특히 그렇다. 하지만 대부분 맞벌이인 부인은 자신과 젖먹이 챙기느라 남편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 여유가 없다. 그래서 "밥 줘"라는 말은 그저 입 안에서 맴돌 뿐이다. 이 무시무시한 말을 발설하려면 대판 싸움을 각오해야 한다. 차라리 출근하는 길에 샌드위치나 김밥 한 줄을 사서 모진 허기를 때우는 것이 맘 편하다.
일 늦어 밤 늦게 들어가거나 외박한다? 이건 죽음을 각오해야 할 일이다. 업무 때문인데도 부인은 남편을 믿지 않는다. '야근 귀신'에 온몸의 생기를 빼앗겨 귀가한 남편에게 "뭐 하다 왔어"라고 야멸차게 몰아붙이는 부인을 보면 남편들은 슬프다. 저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지 생각하면 끔찍하기까지 하다. 물론 한국 사회가 늦은 귀가나 외박을 의심하게 하는 구조가 돼 버린 것은 인정하지만 야속한 건 어쩔 수 없다.
아침 허기와 야근 후 집중 포격에 익숙해져 기본권적 저항조차 무력화될 때쯤인 30대가 되면 한국 남자들은 '독수공방병'으로 신음하게 된다. 부인은 이 시기가 되면 대개 회사에서 승진해 밤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아지기 때문이다. 불 꺼진 집, 남편은 외로이 문을 따고 들어가 요기를 한 뒤 홀로 긴긴 밤을 보낸다. 이럴 때 남편이 할 것이라곤 TV 시청밖에 없으니 대개 이 나이의 남편들은 TV 중독자 신세를 피할 수 없다.
40대. 이건 한국 남자가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될 나이다. 가장 처절하게 전락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돈이 많이 들어간다. 특히 대한민국의 과외비는 살벌하다. 그래서 월급의 절반이 아이들에게 투입된다. 살림이 어려워진 부인은 남편을 공격한다. "돈을 어떻게 이렇게 못 버냐. 애들 과외비가 얼마인지 아냐." 남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무능함에 치를 떨게 된다. 그런데 이 와중에 "누구 아빠는 돈 참 잘 벌더라"는 얘기까지 나오면 남편은 쥐구멍이라도 찾을 판이다.
아이들은 또 어떤가. 머리 컸다고 아버지 말은 완전 무시다. 얼굴도 보기 싫다는 듯 그저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간다. '이런 악동에게 내가 그 엄청난 과외비를 대 주다니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애가 혹시라도 엇나갈까 봐 뾰족한 말 한 마디 못하는 것이 한국의 아버지다.
한국 남자들이 이렇게 사방에서 얻어터지는 것은 왜일까. 가정이 부인과 아이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사회 환경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 남자들 자신에게도 책임은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 14일 KBS 2TV가 첫 방송한 '두 남자의 수상한 숲'은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이 프로그램에 소설가 이외수씨와 함께 출연한 김정운 명지대 여가경영학과 교수는 남성들의 정서적 억압에 주목했다. "아이들은 발달 과정에서 어떤 사물에 대한 어머니의 정서적 반응을 참조하여 규범을 습득(사회적 참조)하게 되는데 남자아이들은 사회적 참조(정서적 표현)가 여자아이들에 비해 억압돼 규범 습득이 왜곡된다는 것"이 요지다.
즉 남자의 특성이 정서적 억압이고, 이런 특성 때문에 가정사에 잠자코 있는 것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가정 내 남성의 구성원적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런 억압에서 풀려나야 한다. 가족치료 전문가 오영식(55)씨는 "가족 구성원 누구라도 표현이 지나치게 억압되면 결국 커다란 화산으로 폭발하게 된다"며 "미리미리 적절한 수준의 불만 표현으로 심리 상태를 관리하고 가정 내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은호 선임기자 leeeunh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