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 미쓰비시가 1989년 뉴욕 맨해튼의 록펠러센터 매입을 발표하자 미국에선 "미국의 혼이 팔려나갔다"는 탄식이 들끓었다. 미국인들의 자존심이 건물 한 채 때문에 갑자기 무너진 건 아니다. 미국은 80년대 들어 산업경쟁에서 일본에게 잇달아 뒤처지면서 40년 전 태평양전쟁 승전의 긍지를 고스란히 반납하고 있었다. 소니의 워크맨에서부터 도요타 캠리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고의 관리능력과 기술력이 결합된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이 부지불식간에 미국을 완전히 점령해버렸던 것이다.
■ 일본은 승자의 기꺼움을 만끽했다. 메이드 인 재팬의 공세를 누그러뜨리고자 엔화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이기로 한 85년의 플라자합의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무역흑자는 주체하기 힘들 만큼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곳간에 돈이 넘치다 보니 씀씀이도 달라졌다. 어느새 일본은 미국 국채의 최대 고객이 되어 있었다. 록펠러센터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의 콜롬비아 영화사 같은 미국의 상징들이 잇달아 일본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85년 세계 10대 은행중엔 미국계가 2개에 불과한 반면, 일본계는 무려 5개나 진입해 '세계의 금고'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았다.
■ 일본에는 찬사가, 미국엔 자조와 냉소가 넘쳤다. 수잔 톨친은 저서 에서 황화(黃禍)에 대한 미국인들의 두려움을 내비쳤다. 마이클 크리천의 베스트셀러 소설 은 급부상한 일본에 대한 경외감을 담기도 했다. 일본이 미국 전체를 사들인다는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우리는 과거의 치욕을 떨쳐버리고, 영광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 하지만 모든 게 한 순간에 일장춘몽이 됐다. 90년대 후반 아시아 경제위기는 동남아에 잠긴 막대한 채권 익스포저를 타고 일본의 금융을 강타했다. 이후 '잃어버린 10년'의 장기침체가 이어지면서 일본 경제는 속절없이 한풀 꺾이고 말았다. 뉴욕타임스(NYT)가 최근 중국 자본의 뉴욕 부동산 매입 열풍을 보도하며 '바이 뉴욕'이라는 용어를 썼다. 6월 말 현재 1조1,655억 달러 어치의 미국 국채를 보유하게 된 중국의 미국 자산 매입에서 80년대 일본의 '바이 아메리카' 열풍을 떠올렸는지 모를 일이다. 21세기 중국의 '바이 뉴욕'열풍이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새삼 궁금해진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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