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학기술부가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역사교과 교육과정 개발 담당 기구들의 합의를 무시하고, 교육과정 고시 직전 뉴라이트 계열 외부 단체의 요구대로 '민주주의'란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한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새 역사 교과서 집필과 검정의 토대가 되는 교육과정 개발을 담당한 국사편찬위원회 산하 역사교육과정개발정책연구위원회 위원들은 16일 성명을 내고 "교육과정 마련 과정 어디에서도 논의된 적 없는 용어를 교과부가 일방적으로 변경했다"며 "학문과 교육 자치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비판했다. 이 성명서에는 전체 위원 24명 중 오수창 위원장(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을 포함한 21명이 참여했다.
교과부가 9일 고시한 새 역사교과 교육과정에서 당초 정책연구위가 제시한 '민주주의'란 용어는 일괄 '자유민주주의'로 변경됐다. 고등학교 한국사 과목에서 '4ㆍ19 혁명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을 살펴본다'는 항목이 '4ㆍ19 혁명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정과 남겨진 과제를 살펴본다'로 바뀌는 등 초등학교 '사회', 중학교 '역사', 고등학교 '한국사' 과목에서 '민주주의'는 모두'자유민주주의'로 대체됐다. 한국사 교육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이란 표현이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초 원안은 실무 연구기구인 정책연구위와 교과부가 구성한 자문기구인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회의 협의로 마련돼 지난달 15일 교과부에 제출됐다. 오수창 교수는 "추진위와의 협의과정이나 공청회에서 자유민주주의란 용어는 전혀 논의가 되지 않았고 원안이 교과부의 교육과정심의회도 통과됐는데, 막판 고시 단계에서 느닷없이 변경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교과부 관계자는 "심의회에서 용어 변경 의견이 일부 나왔고, 심의 뒤 역사단체인 한국현대사학회에서 용어를 바꿀 것을 건의해서 국사편찬위에 이메일 등을 통해 의견을 전달했다"며 "국사편찬위가 최종적으로 이를 수용해서 바꾼 것"이라고 책임을 떠넘겼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의 김광운 편사기획실장은 "정식 공문으로 처리된 것이 아니고 담당 실무자가 현재 해외 출장 중이어서 구체적인 경위를 정확히 모르겠다"고 밝혔다. 주무부서 책임자가 변경 경위를 모르고 있다는 것도 문제지만, 교육과정 개편에 관한 중요 사안이 정식 공문이 아닌 이메일 등을 통한 건의서 전달과 실무자 차원의 업무 처리로 변경됐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 같은 졸속 변경으로 교육과정 전반에 혼선을 야기할 것이란 주장도 제기됐다. 정책위원들은 성명에서 "자유민주주의가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핵심 개념이라면 대한민국 헌법을 정면으로 다루는 '법과 정치' 과목에서 다루는 것이 합당한데, 이 과목에선 자유민주주의 개념을 찾을 수 없다"며 "역사 과목에서 불쑥 그 용어를 사용해 교육 현장에 혼란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용어 변경을 둘러싼 논란은 무엇보다 자유민주주의란 개념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정치적 공방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한국현대사학회 등 뉴라이트 단체들은 우리 헌법의 기본 이념이 자유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이를 교과서에 적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지만, 진보 성향의 역사학자들은 현재 통용되는 자유민주주의는 시장 자유나 정부 개입 반대를 뜻하는 정치적 이념으로 활용되고 있어 합의된 개념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헌법에는 전문과 제4조에 각각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라고 돼 있을 뿐, 자유민주주의란 용어는 나오지 않는다.
김선택 고려대 법대 교수는 "고전적 의미의 자유민주주의는 전체주의나 인민민주주의에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우리 헌법의 기본 이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 협소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다"고 말했다. 오수창 교수는 "민주주의란 용어로 담을 수 있는 내용인데도, 논란이 많은 용어를 무리하게 끼워 넣어 교육현장을 보수와 진보의 이념 논쟁에 휘말려 들게 한다"고 주장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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