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면 어김없이 유혹하듯 찾아오는 '납량'(納凉)이란 말이 있다. 무더운 여름철에 더위를 피하여 '서늘하고 찬 기운을 느끼는 상태'가 납량이다. 납량을 만드는 키워드는 '공포'였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나 방송에서 쏟아내던 납량특집 공포를 보며 자랐다. 내가 느꼈던 최초의 공포는 납량 영화인 '월하의 공동묘지'에서였다. 나는 무섭고 두려워서 엉엉 울면서 본 그 영화에서 '등골이 오싹하다' '소름이 끼치다'는 말뜻을 오줌지리도록 체험했다. 뱀을 무서워해서 뱀이 나오는 영화장면에서 나는 충분하게 납량을 체험하며 자랐다.
그러한 납량특집에 중독이 되어서인지 이젠 더 이상 무섭지 않고 시원하지 않다. 웬만해선 봐서 무서운 영화가 없고 들어서 무서운 이야기가 없다. 유독 뱀을 무서워했지만 이젠 산길에서 독이 없는 산무애뱀을 만나면 오히려 호통을 치는 내가 무서워 뱀이 피하여 달아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그런 것이겠지만 21세기 이 현실이 납량인 탓도 있을 것이다. 올 여름만 해도 그렇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 붓던 물폭탄과 인명피해, 재산피해 그 자체가 납량이었다. 들썩이는 무서운 물가를 보면 한가위 걱정에 벌써부터 오싹해진다.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에 추락하듯 바닥을 내보이는 한국경제지표에서 곧 졸업 학기를 맞이하는 4학년들에겐 세상처처가 무섭도록 서늘한 납량이라는 생각 또한 떠나지 않는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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