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긴 기차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1942년생 천양희 시인은 어린 시절 논둑길을 헤매다 지나가는 기차를 보고 떠올린 이 물음이 그의 문학의 첫 시작이라고 한다. 1981년생 서효인 시인은 열 살 무렵 담임 선생이 촌지를 받지 못하자 그를 때리기 시작한 일을 떠올리며, “처음으로 맞음으로써 시를 맞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씨의 첫 시집 의 1부 제목이 ‘분노의 시절’인데, 젊은 시인의 시적 근원을 엿보게 하는 일화다.
계간 시인세계는 올해 가을호에서 ‘시인의 첫, 내 삶의 첫’이란 제목으로 시인들의 시와 삶에서 ‘처음’이 어떻게 각인되는지를 조명했다. 17명의 시인들은 기억에 남은 첫 순간을 이야기하며 그 처음의 의미를 담은 자신의 시를 실었다.
정호승 시인은 등단작인 ‘첨성대’라는 시에 얽힌 사연을 전한다. 어릴 적 경주의 첨성대 인근에서 살았던 시인은 지금도 노트북 바탕화면에 첨성대 사진을 깔아 놓고 있으며 아호도 ‘첨성’이라 지었다. 첨성대를 보면 20대로 되돌아가는 느낌이라는 그는 시를 쓰는 일도 별을 바라보는 일과 다름 없다고 생각한다.
강은교 시인은 ‘회귀’라는 시를 실으며 첫 아이의 죽음을 회상한다. 두 돌 된 아이를 잃은 어미의 심정을 담담하게 적는다. ‘그렇게 신혼 시절은 갔다. 별처럼 눈부셨던, 푸른 시절은.’
오탁번 시인과 신달자 시인은 성(性)의 처음을 얘기한다. 오씨는 59세가 된 어느 날 중환자실에서 문득 발기를 경험한 순간의 느낌을 떠올리고, 신씨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몸을 성적으로 체험한 첫 순간을 전한다. 시인세계는 “첫사랑, 첫작품, 첫죽음, 첫여행, 첫만남 등 삶의 정수리에 반짝이는 기억으로 각인된 ‘첫’은 시인으로서의 탄생의 순간, 새로운 세계의 진입로와 같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