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임금현실화를 요구하며 청소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던 이화여대. 지난달 중순 이 학교에 새로운 노조가 생겼다. 이 학교의 모든 청소ㆍ경비 노동자들이 가입할 수 있는 기존 산별노조(공공노조 이화여대 분회)와 다른 노조다. 새 노조는 이 대학 용역업체 중 하나인 동서기연의 기업노조로, 조합원은 종전에 이화여대분회에 속하지 않았던 60여명 정도다. 분회 조합원 중 동서기연 소속은 현재 70여명. 따라서 이들 중 몇 명만 이탈해 새 노조에 가입하면 10월 임금협상 때 새 노조가 분회 대신 동서기연과 협상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소속 용역회사와 상관없이 전 청소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중점적으로 교섭해온 현재의 산별교섭은 사실상 무력화된다.
사측은 "조합원 스스로 판단해 새 노조에 가입을 결정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화여대 분회는 새 노조 설립에 회사가 깊이 간여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분회 관계자는 "중간관리자인 조장들이 비노조원이나 신입직원들에게 1주일에 두 번씩 밥을 사주기도 하고, 편한 작업화와 작업복을 주겠다며 새 노조 가입을 권한다고 한다"며 "최근 몇 년간 분회의 투쟁으로 임금도 오르고 주5일도 쟁취하니 분회를 눈엣가시로 여긴 회사가 어용노조를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요즘 서로 다른 노조원들끼리는 인사도 안하고 밥도 따로 먹는 분위기"라며 "얼마 전 남자직원들이 주먹다툼까지 벌였는데 이런 상황은 장기적으로 회사에 손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직장에 여러 개의 노조설립이 가능한 복수노조제도가 허용된 지 14일로 한 달 반이 됐다. 그 사이 새로 생긴 노조는 377개(15일 현재). 하루 평균 9개 안팎의 노조가 새로 생기고 있는 셈이다. 고용노동부는 "현장 근로자 중심의 합리적 노동운동이 자리잡고 있다"고 평가했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강성노조가 조합원들의 신임을 얻어온 사업장의 경우 회사가 은밀히 '어용노조'를 세워 노-노 갈등을 부추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3월 청소노동자 파업에 참가했던 연세대 분회도 분위기가 심상찮다. 지난달부터 특정 용역업체 소속 조합원 90여명이 한꺼번에 연세대 분회에서 탈퇴했다. 분회 관계자는 "탈퇴자들이 분회가 보관 중인 양식과 다른 탈퇴서를 내길래 추궁하니 '회사 관리자가 탈퇴서를 나눠준 뒤 쓰도록 했다'고 하더라"며 "회사에 우호적인 어용노조가 등장하면 교섭권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이 빚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금속노조는 7월 1일 이후 10여개 사업장에서 이러한 어용노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유성기업, 보워터코리아, 엔텍, KEC 등 격렬한 파업이 있었고 해고자가 나왔던 곳이 대부분이다.
15일 고용부에 따르면 복수노조 허용 후 기존 노조가 있는 사업장에서 새 노조가 생겨 조합원 과반수를 확보한 곳은 78개다. 이 가운데 민주노총에서 분화된 신규 노조가 47개로, 새로 과반을 확보한 노조의 60%를 차지한다. 민주노총은 이중 상당수가 회사와 영합하는 어용노조라고 보고 있다. 이승철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사용자들에게 최적화된 제도 탓에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민주노조들의 경우 탄압의 표적이 되고 있다"며 "민주노총이 있던 사업장에서 사용자가 주도하는 노조들이 기승을 부리는 현상이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측이 교섭창구단일화 제도를 악용, 기존 노조를 무력화하려는 정황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지난해 6월부터 1년 가까이 노조의 파업과 사측의 직장폐쇄가 이어졌던 KEC의 경우 기존 노조인 금속노조 지회의 교섭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심각하다. 복수노조 시행일까지 지회의 교섭요구를 차일피일 미루던 회사는 7월1일 이후 회사에 우호적인 노조가 세워지자 지회에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를 밟도록 요구했다. 지회는 이를 거부했고 소송(교섭응낙가처분신청)을 통해서야 교섭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복수노조 시행 이전부터 파업을 벌였던 삼화고속도 사정이 비슷하다. 기존 노조(민주노총) 조합원이 압도적 다수이지만 회사는 이 노조와의 교섭을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다가 7월 이후 두 개의 노조가 새로 생기자 회사는 교섭대상에서 기존 노조를 제외한다고 공고했고, 결국 기존 노조가 교섭창구단일화 절차를 밟은 뒤에야 교섭에 응했다. 이 노조 관계자는 "고용부도 우리 지회의 교섭권을 인정했지만 회사는 까다로운 교섭권 단일화 절차를 밟도록 해 노조의 힘을 빼려 했다"고 주장했다. 금속노조 산하 엔텍, 한국노총 산하 경진운수의 기존 노조들도 복수노조가 허용 후 회사가 교섭에 응하지 않아 소송을 벌이는 등 갈등을 빚고 있다.
노동계는 복수노조 교섭창구를 강제로 단일화하도록 한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이 제도가 복잡한 단일화 과정에서 빚어지는 비용과 갈등을 전적으로 노조에 떠넘기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개별교섭도 가능하지만 개별교섭 승인 권한이 사측에 주어져 있어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고용부에 따르면 현재 복수의 노조와 개별교섭을 진행중인 회사는 5곳으로 대부분 조합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조가 강성인 곳이다. 전문가들도 현행 창구단일화제도가 지나치게 경직적이고 노사갈등을 유발하는 제도라고 지적한다. 이념, 노선, 세력이 다른 노조가 단일화하기는 쉽지 않아 결국 노조간에 더 많은 노조원을 차지하기 위해 격한 싸움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신은종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절차를 세세하게 규정한 지금의 창구단일화제도는 노노갈등을 더 조장할 가능성이 높다"며 "사측이 모든 노조와 자율적으로 교섭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현행 제도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부는 복수노조 시행을 틈타 만들어진 어용노조가 적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사측의 부당행위를 단속하겠다고 밝혔다. 노조법에 따르면 사용자가 노조 설립이나 운영에 개입할 경우 2년 이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하지만 어용노조에 대한 사측의 지원이 은밀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단속이 성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정승임기자 cho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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