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파 음악인 1호'인 국내 1세대 피아니스트 한동일(70)씨. 6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4회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 피아노 부문 2위를 차지한 국내 3세대 피아니스트 대표주자 손열음(25)씨.
할아버지와 손녀뻘 되는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모였다. 13일 경기 수원시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열린 '피스 앤 피아노 페스티벌' 오프닝 공연에서다. 행사의 서막을 알리는 연주를 나란히 펼친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는 어색함을 느낄 새도 없이 금세 피아니스트로서 조언과 존경심을 아낌없이 표현했다.
한씨가 1세대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것은 12세이던 1954년 6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의 폐허 속에 당장 먹고 살기가 빠듯했던 시절 주한 미 공군 새뮤얼 앤더슨 중장의 후원을 받아 뉴욕 줄리어드 음대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65년에는 리벤트리트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 국제 콩쿠르에 입상한 첫 번째 한국인이 됐다. 이후 뉴욕 필하모닉, 시카고 필하모닉, 런던 필하모닉 등 세계 25개국의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세계무대에서 입지를 굳혔다.
1986년 강원 원주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동네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손씨도 소문난 신동이다. 12세 때이던 97년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청소년 국제콩쿠르에서 1위 없는 최연소 2위를 수상하며 세계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2000년 독일 에틀링겐 피아노콩쿠르 1위, 2002년 이탈리아 비오티 콩쿠르 최연소 1위 등 각종 콩쿠르에서 최연소 수상을 전매특허처럼 따냈다. 현재는 독일 하노버국립음대에 다니며, 예술의전당 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오프닝 공연 후 열린 리셉션에 함께 참석한 한씨는 손씨에게 "열음씨가 재작년 밴 클라이번 콩쿠르 파이널 라운드에서 연주하는 것을 봤다"며 "그때 너무 잘 쳤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그 말을 하게 됐다"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손씨도 "한 선생님은 제가 어렸을 때 가장 우상으로 모신 분으로, 몇 년도에 무슨 일을 하셨는지 일대기를 꿰고 있을 정도"라고 화답했다. 손씨는 이어 "사실 저를 모르실 줄 알았는데 제가 연주하는 걸 이미 보셨다고 하셔서 너무 감격스러웠다"고 존경의 뜻을 나타냈다.
어릴 적부터 신동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두 사람은 세상의 기대가 주는 부담감에 대해서도 깊은 공감을 나눴다. 인생 선배인 한씨는 "어릴 적부터 혼자서 외국 생활을 오래하고 여유라곤 전혀 없는 연주 일정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다"며 "당시에는 그런 생활이 너무 싫어 28살 때부터 미국 인디애나대학과 보스턴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했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손씨에게 "진정 마음으로 즐기는 연주를 해야 본인과 세상의 기대에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남 몰래 고민하던 문제를, 두 세대를 건너 띈 피아니스트 선배로부터 듣게 되자 앳된 손씨의 얼굴이 어느새 환해졌다. 20일까지 열리는 페스티벌은 두 사람 외에도 임동혁씨 등 국내 정상급 피아니스트 10명이 함께 공연을 펼치는 국내 첫 단일 악기 전문예술축제다.
이태무기자 abcdef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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