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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시로 여는 아침] 오른손은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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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시로 여는 아침] 오른손은 모르게

입력
2011.08.14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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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왼손은 수십 개의 사소한 실망들을 알고 있다. 왼손은 조금 더 가까운 데서 생각한다. 왼손은 먼저 떨린다.

지붕 위에 내려앉는 새들의 무게와 함께 밤의 이동속도로 나의 왼쪽에서는 무언가 꿈틀거리는 기색.

왼손에겐 친구가 필요해. 아주 분명한 친구.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목으로 악수를 청하는 친구.

왼손이 좋아하는 것은 갑자기 왼손이 되는 것. 안개야 양떼처럼 흩어질 수 있겠지만 그 순간 왼손은 사냥개가 되는 것. 그것에 꽂히는 것.

매일 오른손도 모르게 왼손이 사라진다. 세어야 할 것들이 많은데 가리켜야 할 것들이 많은데

스르르 펴진 뒤에 왼손은 낯선 이에게 인사하는 데 천재. 쥐락펴락 혼자 손금을 만들다가 불현듯 그것이 되는 것 역시.

한낮의 거리에서 당신과 손을 잡고 걸어가다가 당신의 손바닥을 뚫고 튀어나간 나의 왼손은.

● 이 시를 읽으면 칼 크롤로브의 시 한 구절이 떠올라요. "너무 오랜 동안/ 나의 오른손은/ 의무를 다해 왔다."('너무 오랜 동안') 오른손은 대체로 의무를 수행합니다. 숟가락을 쥐거나 펜을 쥐거나 공식적인 악수를 위해 딴 사람의 손을 쥐면서요. 세상은 점점 양손 모두 의무를 수행할 것을 요구하지만, 시인은 '오른손은 모르게' 왼손의 딴 짓을 꿈꿉니다.

왼손의 욕망은 양떼처럼 흩어지고 사라지는 낯선 것들을 따라 사냥개처럼 달려가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쫓는 것이 마냥 신날 뿐 양떼를 주인에게 몰고 오는 일은 매번 실패. 그렇지만 그런 실패도 제법 괜찮아요. 크롤로브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저녁에 옷을 벗듯이/ 나는 벗어버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주어버리고 났을 때/ 남는 그것을 위한 공기의 아늑함." 모든 것을 놓아버린 두 손은 공허함이 아니라 공기의 아늑함으로 가득해요. 이 아늑함을 위해 시인의 왼손은 연습 삼아 놓아버립니다. 가끔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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