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의 개혁ㆍ개방을 주도해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정작 소련의 붕괴 당시 급변하는 정세를 정확히 읽지 못하고 오판했던 정황이 드러났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12일(현지시간) 고르바초프재단이 보관해온 공식기록물 1만여건 중 미공개분 3만쪽의 문건을 통해 소련 붕괴 당시 급박한 상황을 묘사했다.
고르바초프의 최대 실책 중 하나는 정치적 맞수였던 보리스 옐친 공산당 최고회의 의장을 과소평가한 것. 그는 1991년 2월 헬무트 콜 독일 총리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는다. 옐친이 TV방송으로 고르바초프가 곧 사임할 것이라고 밝힌 다음 날이다. "옐친이 원한 대로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느냐"라는 콜 총리의 물음에 고르바초프는 "점점 권력을 잃고 고립되고 있다고 느낀 옐친이 절박한 심정에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4개월이 못돼 옐친은 초대 러시아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91년 8월19일 고르바초프는 보수세력인 국가보안위원회(KGB)와 군부의 쿠데타로 휴가지 별장에서 3일간 연금됐다 풀려났다. 8월 22일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후 옐친은 소련공산당의 모든 활동을 금지했다.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의 손발을 자른 것이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90년대 이전까지 콜 총리도 미국의 대변자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유럽방문 중에는 의도적으로 서독을 피해갔다. 하지만 소련 붕괴가 다가오자 콜 총리에게 매달렸다. 당시 소련에는 비누부터 분유까지 모든 생필품이 부족했고 고르바초프의 대중적 지지도도 추락하고 있었다. 쿠데타 이후 9월 소련의 재정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고르바초프는 한스디에트리히 젠스커 독일 외무장관에게 "최소 20억달러가 필요하다"며 읍소했지만, "답변할 권한이 없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
고르바초프는 세계를 이끄는 리더의 이미지와 달리 이면에서는 지원을 구걸하는 처지였다. 91년 주요 7개국(G7) 회의에 처음 참석한 고르바초프의 공식적인 참가 목적은 소련이 G7 회원국에 드는 것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300억달러의 구제금융이었다. 슈피겔은 그러나 그가 국제통화기금(IMF)의 통제를 거부하며 버텨 소련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고 지적했다.
소련 붕괴에 앞서 연방 소속 국가들이 속속 독립할 때도 고르바초프는 속수무책이었다. 5월30일 콜 총리는 "서유럽과 미국에서 당신의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고 전했지만 고르바초프는 "그들이 진정 원한다면 그렇게 하는 길 뿐"이라고 말했다. 이후 연방 탈퇴는 이어졌고, 고르바초프는 결국 나라 없는 대통령으로 전락했다.
이동현기자 na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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