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이 미국과 유럽의 재정위기에서 촉발된 금융시장의 혼란을 틈타 우리 사회의 복지확대 논의를 심각히 왜곡하는데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명박 대통령 등 보수진영은 연일 "복지 포퓰리즘(대중 영합주의)이 위기를 불렀다"며 경계감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복지 수준이 과잉을 걱정해야 할 정도인지, 선진국들이 과연 복지 과잉 때문에 어려워졌는지에 대한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나라마다 재정위기의 원인이 다른데도 '과다한 복지 지출→재정위기'로 몰아가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자 왜곡이라고 지적한다. 지금은 복지 과잉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걸맞지 않게 낙후된 복지 울타리를 촘촘히 하는데 집중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관련기사 3ㆍ4면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0일 "재정위기를 감안해 내년 예산안을 전면 재검토하라"고 지시하며 그리스를 반면교사의 사례로 들었다. 표면적으론 재정건전성을 강조했지만, 사실상 느슨한 연금제도 등으로 지탄받아온 그리스를 빗대 최근 국내의 복지확대 요구를 경계한 발언으로 해석됐다. 이 대통령은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재차 경고할 것으로 알려졌다.
선진국 재정위기는 여당과 보수진영에게도 복지 포퓰리즘 공격의 호재가 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무상급식을 "망국적 포퓰리즘"으로 규정했고,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과잉복지 논쟁은 삼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여권의 복지 과잉론은 아전인수식 근거들에 기초한데다, 자칫 '복지=위험한 것'이라는 인식을 퍼뜨려 건전한 사회적 논의의 본질을 호도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여권은 우선 과도한 복지가 미국과 유럽의 빚을 늘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4조달러에 이르는 국가부채로 이번 혼란의 진원지가 된 미국은 2000년대 이후 지속된 감세정책과 천문학적인 국방비, 2008년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재정지출이 채무 증가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남유럽 국가들 역시 그리스는 지하경제, 포르투갈은 낮은 노동생산성, 아일랜드는 금융 부실 등이 제1원인으로 지적된다. 과도한 연금 등 복지 과잉은 여러 병폐 중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복지 과잉론은 현재 우리의 복지 수준에 견줘봐도 설득력이 없다. 남찬섭 동아대 교수에 따르면 각각 국민소득 1만달러와 2만달러 시기,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사회지출 규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3분의1~6분의1에 불과하다.
오히려 턱없이 부족한 복지가 양극화를 심화시켜 더 큰 비용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양극화에 따른 갈등이 사회 전반의 생산성을 떨어뜨려 세수 감소와 재정 악화로 연결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중산층 비중을 늘리는 데는 사회복지지출 등 정부의 재정 작용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자감세와 4대강 사업 등 세출ㆍ입 구조는 그대로 둔 채 무조건 "재원마련 방안이 없는 무책임한 요구"라고 비판하는 행태나 "무상복지를 늘리면 국가지원을 바라고 일하기를 꺼린다"는 이른바 복지병 주장도 현실과는 동떨어진 발상이라는 지적이 많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지금 세계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성을 의심받는 중대 기로에 서 있다"며 "'돈이 많이 드니 안 된다'는 단순 사고에서 벗어나 '어떻게 효율적으로 걷어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를 위해 더 쓸까'에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과 고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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