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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우유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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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우유의 추억

입력
2011.08.11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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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는 부잣집 아이만 마시는 줄 알았다. 작은 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양유(羊乳)는 더러 얻어먹을 기회가 있었다. 사실 그것은 양유가 아니라 '염소 젖'이었지만, 당시엔 양(sheep)과 염소(goat)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았다(1955, 1967년생을 양띠 혹은 염소띠라 한다). 바로 짜서 그릇에 담아 가져왔는데 미지근하고 느끼한 맛이 영 내키지 않았다(염소 생각도 나고). 초등학교 때 도시로 나와 처음 마신 배급품 우유는 시원하고 고소한 맛이 오래 남았었다. 우유를 굳혀서 쪼갠 것들도 가끔 배급됐는데, 이빨로 갉아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우유를 '가장 완전한 식품'이라 정의했다. 유목생활을 하던 중동에서 5,000년 전부터 동물의 젖을 즐겼다니 양(羊)유, 마(馬)유, 낙타(駱駝)유 등이 우유보다 앞섰을 터이다. 성경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표현이나, 몽골 징기스칸이 병사들에게 건조유(乾燥乳)를 휴대토록 한 기록도 '소의 젖'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다. 20세기 들어 영국이 일반식품으로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신이 준 가장 고귀한 선물(엘리자베스 여왕)', '가장 안전한 투자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이는 일(처칠 총리)' 등의 찬사를 유행시켰다.

■ 우리의 경우 '송아지의 밥'을 빼앗아 먹는 것은 임금이나 대신들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찹쌀과 물에 우유를 섞어 끓인 '타락죽(駝酪粥)'이 궁중 보양식으로 애용됐는데 고려시대 몽골 침략 직후부터라고 한다. 이후 우유소(牛乳巢)라는 '젖소 농장'을 만들었다가 조선시대 세종 때 송아지가 굶어 죽는다는 얘기를 듣고 폐지하기도 했다. 서양문물을 흡수한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 우유가 일반 음식으로 선보이기 시작했으니 역사가 길다고 할 순 없겠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의 아이들은 젖소가 키운다'는 말이 과언이 아닌 상황이 됐다.

■ 낙농가와 업계의 원유가(原乳價) 줄다리기가 초미의 관심사다. 엊그제 민주당 김영록 의원의 지적에 주목한다. 상승 폭이 컸던 2008년 당시 낙농가의 원유는 120원(L당) 인상됐는데 일반 소비자가격은 380원이 올랐다는 내용이다. 원유가가 올랐다지만 원유를 수집ㆍ가공ㆍ운반ㆍ판매하는 데 드는 비용이 3배 이상 올랐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 우유는 이미 부자나 특권층만 마시는 게 아니라 밥이나 김치 못지않게 일반화한 지 오래다. "설령 500원이 오르더라도 낙농가에게 제대로 돌아간다면 감수하겠다"는 어느 주부의 말이 오히려 이해하기 쉽다.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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