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무사히" 되뇌일 뿐… 산재 인정은 '바늘 구멍' 화병 걸릴판
"울며 겨자 먹기로 일터에 나갈 수밖에 없어요. 아파도 쉬면 내 손해니까…."
퀵서비스 기사 정병천(51)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찔한 경험을 한다. 경력 16년의 베테랑이지만 요즘은 폭우로 도로가 깊게 패인 곳이 많고 미끄러워 조금만 부주의해도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어깨를 삐거나 무릎이 깨지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업무 중 사고가 분명하지만 별다른 보상은 없다. 민간보험에 들고 싶어도 위험하다며 받아주지 않고, 자영업자의 성격이 있는 특수고용노동자라 산재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다. 정씨 같은 퀵서비스 기사는 전국적으로 10만~12만명이나 된다. 정씨는"2년 전 배달에 나선 동료가 오토바이 전복 사고로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을 찔러 숨지는 모습을 봤다"며 "보상 한 푼 못 받는 것을 보고 산재보험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어 매일 아침 '오늘도 무사히'를 기도하는 게 고작"이라고 씁쓸해했다.
도입 40년… 사각지대 여전
사용자들로부터 거둔 보험료로 기금을 조성해 산업재해자들을 보상해주는 산재보험은 1964년 도입돼 40년 가까이 흘렀지만 사각지대는 여전하다. 고용보험과 마찬가지로 피보험 대상자를 근로기준법의 '근로자'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퀵서비스 기사 같은 특수고용노동자는 물론이고 '병을 돌보다 병을 얻는' 간병인, 6월 국제노동기구(ILO)가 산재보상을 받도록 권고한 가사노동자, 대다수의 농민ㆍ어민ㆍ자영업자 등은 산재보험에 가입이 안된다. 2007년 기준 우리나라의 산재보험 피보험자는 1,253만명으로 취업자(2,343만명)의 49.9%에 불과하다. 독일의 경우 전체 인구의 92% 정도가 산재보험 대상자다.
보험에 가입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상당수다. 골프장 캐디, 보험설계사 등 4개 직군의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2008년 산재보험 가입이 가능해졌지만 가입률은 오히려 매년 낮아지고 있다. 2008년 15.4%였던 가입률은 현재 8.5%로 반토막 났다.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적용을 제외할 수 있다'는 조항 때문이다.
11년간 캐디로 일한 이은옥(42ㆍ여)씨는 "골프장 측이 '산재보험에 가입하면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며 적용제외 신청서를 쓰도록 했다"며 "캐디들은 날아오는 공에 맞는 등 산재 위험이 높지만 회사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재해율이 높은 건설 현장의 산재 은폐 문제도 여전하다. 산재신고가 많은 건설회사는 관급공사 수주에 불리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공상(회사가 비용 부담) 처리해 수습한다. 고용부가 발표한 2009년 산업재해자는 9만7,821명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실제로 고용부 공식발표의 10~30배 이상의 산재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윤조덕 한국사회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산재보험 사각지대의 해소를 재정적 측면에서 접근하면 개선방안을 내놓을 수 없다"며 "생산 가능한 건강한 노동력을 확보해 국가경쟁력을 높이자는 관점에서 산재보험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업무상 질병 산재인정은 하늘의 별따기
제조업ㆍ생산직 위주의 산재 판정제도가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전통적 산재로 여겨지는 골절, 절단 등 업무상 사고도 많지만 최근에는 스트레스로 인한 뇌경색, 심근경색 등의 질병이 많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런 질병은 산재 인정이 까다롭다. 특히 2008년 산재판정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의사, 법조인들로 구성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가 꾸려진 뒤 이 같은 현상은 더 심해졌다. 2008년 43.5%였던 업무상 질병 승인율은 올해(6월 현재) 35.2%까지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직업병 인정기준의 범위에 대해 "컴퓨터가 없고 삐삐 차고 다녔던 시대에 머물고 있어 노사가 서로를 깎아 내리는 형국"이라고 꼬집는다.
직업성 암의 산재인정은 하늘의 별따기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 두 명의 유족들은 산재인정을 요구한 지 4년 만인 올해 6월에야 법원에서 산재 인정을 받았다. 1년에 150~200명 정도가 직업성 암(폐암, 림프종, 백혈병 등)의 산재인정을 요구하지만 산재승인율은 2009년 13.6%, 지난해 17.9% 정도다.
산재 입증의 책임을 산재 피해자에게 지우는 점도 문제다. 문길주 금속노조 노안국장은 "노동자나 노조 입장에서는 사업주가 협조해주지 않으면 산재 관련 서류를 준비하는 데만 두 달 넘게 걸린다"며 "암에 걸리거나 백혈병에 걸려 무균실에 누워있는 사람에게 업무 관련성을 입증하도록 하는 현 제도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했다. '현재 입증된 바 없으니 업무상 질병으로 볼 수 없다'고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우리와 달리 외국의 산재 인정은 훨씬 관대하다. 까다로운 편에 속하는 일본도 산재자의 입증부담이 우리보다 훨씬 가볍다. 업무와 연관 있는 사고ㆍ질병이라고 피해자가 신청 하면 공단이 이를 반증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산재자가 근로복지공단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사전승인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임준 가천의학전문대학원 교수(예방의학)는 "건강보험처럼 의료기관이 산재환자의 청구를 대리하고 제 3의 기관이 산재 여부를 판정하게 한다면 산재 노동자들의 산재보험 접근성이 크게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정승임기자 choni@hk.co.kr
■ 산재 80%는 영세사업장에서
우리나라 산업재해의 80% 이상은 종업원 50명 이하 영세사업장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보건관리, 사업장 안전점검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50명 이상 사업장은 자체적으로 보건ㆍ안전관리자를 두거나 대행기관에 이 업무를 위탁하도록 돼있으나 50명 이하의 사업장은 그런 의무가 없다. 그렇다고 전국적으로 300여명에 불과한 안전보건분야 근로감독관들이 150만개에 달하는 50명 이하 사업장을 모두 감독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문제 때문에 고용노동부는 1986년부터 '대행기관 기술지도제'를 실시하고 있다. 대행기관에 소속된 안전ㆍ보건관리자들이 1년에 네 차례 이상 영세사업장을 찾아 직업병 예방교육을 하고 안전점검을 하는 제도다. 고용부는 "매년 이 제도를 활용하는 사업장들이 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 효과가 있는지는 미지수다.
올해 초 고용부의 감사로 적발된 국내 최대의 보건대행기관인 대한산업보건협회의 경우 검진결과를 부적절하게 판정하거나 유해물질이 검출돼도 기록하지 않는 등 온갖 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 협회 소속 보건관리자 A(39)씨는 "현실적으로 대규모 사업장보다 영세사업장이 산재 사각지대에 놓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영리추구에 급급한 대행기관, 검진을 맡아야 할 산업보건의사의 부족, 사업주들의 무관심 등이 맞물린 결과라는 설명이다.
산업보건의가 진폐증, 난청, 중금속중독 여부를 검진하는 특수검진은 직업병을 예방할 수 있는 중요한 제도다. 그러나 보건대행기관에서 일하려는 산업보건의가 크게 부족한 상태에서 '의사 1명당 연간 1만명'으로 검진인원을 제한함에 따라 대행기관으로서는 특수검진비용을 부담 없이 지급할 수 있는 대형사업장 위주로 의사들 내보낸다. 대형사업장에서 규정된'1만명'을 검진하면 새로운 산업보건의사를 고용해야 하지만, 지원하는 의사도 부족하고, 연봉도 부담이 돼 영세사업장에는 의사들을 내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A씨는 산재 예방에 대한 사업주들의 무관심도 꼬집었다. 그는 "보건교육을 1시간 이상 진행하면 그만 끝내고 빨리 가라고 눈치를 주는 사업자들도 꽤 많다"며 "사업장 특성에 맞는 보건업무 지원은 꿈도 못 꿀 실정"이라고 말했다. 1년에 4차례 이상 사업장을 방문해야 하지만, 사업주가 거부해 한두 번만 방문하고 마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A씨는 덧붙였다.
고용부 관계자는 "대행기관제도의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있다"며 "대행업체에 대한 관리뿐 아니라 규정을 어기는 소규모 사업장에 대한 감독도 동시에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정승임기자 cho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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