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 가는 길에 연꽃이 피었습니다. 많은 비 다음에도 세찬 바람 다음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연꽃이 피었습니다. 꽃은 약속 같은 것이라고 당신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약속, 비와 바람의 약속, 꽃과 사람의 약속이 있었기에 꽃이 피는 것이라고. 그러기에 팔월 연꽃의 약속은 정직하고 또한 맑고 향기로운 약속입니다.
하지만 연꽃 필 때 서라벌에 같이 가겠다는 그 약속을 올해는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백련에게서 백련이 피고 홍련에게서 홍련이 핍니다. 그 단순한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이 사람의 약속인가 싶습니다. 약속 앞에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도 사람뿐입니다. 연꽃이 피기를 간절하게 기다려온 당신에게 굳이 변명을 하자면, 여러 날 나를 괴롭히는 '현훈'(眩暈)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심한 이명(耳鳴)을 앓았는데 그 이후 그 아픈 자리에 연꽃이 피어 나를 자꾸 어지럽게 합니다. 누워있어도 어지럽고 일어서도 어지럽습니다. 눕지도 일어서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그 사이에 하늘과 땅이 자리를 바꾸는지, 비와 바람이 몸을 바꾸는지, 꽃과 사람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지 아득하여 혼미해집니다. 서라벌에 연꽃 보러 가자는 약속을 내년으로 미뤄야겠습니다. 꽃 보다 못한 사람의 약속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미당의 시처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섭섭하지 않게 또 한 번 기다려주실 수 있을는지요.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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