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푸어스(S&P)가 미국이라는 제국에 침을 뱉은 꼴이다. S&P가 지난 5일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최고 등급인 AAA에서 한 단계 낮은 AA+로 강등하면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금융, 경제가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부나 투자의 귀재라는 워런 버핏이 뒤늦게 "미국은 AAA 아니라 AAAA 국가"라고 S&P에 책임을 돌리며 강변해봐야 엎질러진 물이다. 이번 사태로 촉발된 세계 금융의 패닉 상태가 어디까지, 언제까지 갈지는 아무도 모르겠다는 눈치다.
불과 3년 전인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시작해 미국의 금융자본주의와 글로벌 금융시장이 '1만년 만의 위기'라고 불린 파국을 맞았을 때 등장해 각광받은 개념이 '블랙 스완'이다. 세상에 하얀 백조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인간들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검은 백조처럼, 인간이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예측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또 그만큼 파급력도 극단적으로 큰 사건을 가리키는 용어다. 1,000일 동안 주인이 주는 먹이를 매일매일 맛있게 받아먹고 살쪄가던 칠면조가 추수감사절을 앞둔 1,001일째 되는 날 하루아침에 주인에 의해 목이 날아가는 것처럼, 칠면조 입장에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 바로 블랙 스완이다.
'미국 정치 무기력' 타기한 S&P
이 개념을 책으로 써서 유행시킨 레바논 태생의 월스트리트 투자전문가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블랙 스완을 부정하거나 예측하려 할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 현대인의 숙명"이라고 말한다.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3년 만에 전 세계 증시가 또다시 '블랙 데이'를 겪고 있는 것을 보면 탈레브의 말은 숙고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렇다면 2011년 8월 5일에 날아든 검은 백조는 예측이나 대비가 불가능했던 것일까. 지금 미국 신용등급 강등을 놓고 책임 공방을 벌이고 있는 미 정부 측과 S&P의 입장은 이 지점에서 갈라진다. S&P의 국가신용등급위원회 의장 존 체임버스는 등급 강등 결정의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재정적자 수치는 부차적인 것이다. 미국 정치의 무기력이 더 큰 문제다."
미 민주, 공화 양당은 미국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규모인 14조5,800억 달러의 정부부채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에서 재정적자의 원인과 증세, 복지예산 축소 등 상반되는 해결방안을 놓고 서로 네탓을 하며 정쟁을 벌이다 지난 2일 2조4,000억달러 규모의 부채 감축 계획안에 겨우 합의했다. 하지만 S&P는 이미 지난 4월 미국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바꿨고, 지난달에는 최소 4조 달러의 부채 감축 계획을 내놔야 AAA 등급을 유지할 수 있다고 경고한 상태였다. S&P는 나아가 지난 7일에는 민주, 공화 양당의 합의내용 실행 가능성에도 의문을 표하면서 "정치권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AA 등급으로 추가 강등할 수도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S&P로서는 블랙 스완을 사전 경고했다고 볼 수도 있는 셈이다. 해리 리드 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공화당과 합의안 타결 직후 "이번 입법은 전형적인 타협 입법이다. 어느 쪽도 원하는 바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바로 타협의 본질"이라고 호언했다. 그러나 이 멋드러진 수사는 신용평가사가 휘두른 칼 앞에 한없이 초라해지고 말았다.
물론 S&P를 포함한 무디스, 피치 등 미국의 이른바 세계 3대 신용평가사는 2001년 엔론 사태, 2008년 리먼 사태 당시 이들 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한 엉터리 평가로 투자자 손실과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주범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이들은 또한 IMF사태 당시 한국의 신용등급을 6~12단계나 강등시켜 혼란을 더 부채질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들의 평가라는 것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한국 대응에 반면교사 삼아야
그러나 S&P가 보낸 신호를 미 정치권은 정쟁 때문이든 협상력의 결여 때문이든 무시했고, 결과적으로 블랙 스완이 날아들도록 방치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정치력, 정책, 리더십의 부재가 경제적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이번 사태 극복을 위해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일이다. 국내에서는 이번 사태에 따른 주가 폭락으로 6일 동안 시가총액 209조원이 날라갔다. 최근까지도 최대 이슈였던 반값등록금 소요 재원이 대략 7조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허망하다.
하종오 편집국 부국장 joha@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