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 60% "고용보험은 그림의 떡"… 실직하면 당장 생활고
올해 2월 대학(서울대 농대)을 졸업한 김형근(25)씨는 요즘 서울 마포구의 한 보습학원에서 하루 8시간씩 주 3회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취업준비를 해야 한다고 마음 먹지만 일을 그만둘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하다. 월 120만원 정도의 강사료마저 끊긴다면 매달 갚아야 하는 대출학자금(15만원)과 집세(25만원)를 낼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이 일자리도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김씨는 지난해 한 보습학원에서 4개월 강사로 일하다가 "학원을 급하게 접어야 한다"는 학원장의 문자를 받고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된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나 지금이나 김씨의 신분은 개인사업자다. 고용보험료 부담을 떠안지 않으려는 학원은 은연중 이런 식의 계약을 종용한다. "일자리를 잃어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는 김씨는 "실직하면 뾰족한 대책이 없어 아무 일자리나 고르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고 말했다.
정규직 위주의 반쪽짜리 고용보험
실직자의 생계 지원과 재취업 촉진을 목표로 1995년 도입된 고용보험의 가입률은 58.9%(2010년ㆍ임금노동자 기준)로 4대 보험 중 가장 낮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영세사업장의 가입률 격차는 현격하다. 정규직의 가입률(67.2%)은 비정규직(42.1%)의 1.5배 수준이고, 300인 이상인 대기업 노동자의 가입률(74.5%)은 1~4인 사업장 노동자의 가입률(25.7%)의 3배다.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일자리는 실직위험도 높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노동자가 1년간 직장을 유지하는 비율(41.0%)은 고용보험 가입 노동자(76.3%)의 절반 수준이다. 비정규직과 임시직을 전전하는, 정작 실업급여가 꼭 필요한 저임금 노동자들이 오히려 실업보험 가입률이 낮아 실업급여 혜택을 못 받고 있는 것이다.
비임금노동자들은 아예 제도 밖에 방치돼 있다. 전체 취업자의 30%로 약 700만명으로 추산되는 자영업자를 비롯해 가사도우미나 베이비시터 등 가사노동자, 택배기사나 퀵서비스 기사 등 특수고용노동자들은 고용보험에 가입할 자격이 없다. 직업을 얻지 못한 청년 실업자, 육아 등으로 일을 그만 두었다가 다시 직장을 구한 경력단절자 등도 고용보험의 혜택을 못 받는다. 내년부터 영세 자영업자(50인 이하 고용)들도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지만 노사가 보험료를 절반씩 내는 임금노동자들과 달리 가입자가 보험료 100%를 내는 임의가입 방식이라 현장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2009년 국회예산정책처 자료에 따르면 취업자(2,274만명) 중 절반 이상인 1,336만명(58.8%)이 고용보험의 혜택을 못 받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고용보험은 정규직 임금노동자들 위주의 '반쪽 제도' 노릇밖에 못하고 있는 셈이다.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고용보험 가입의 문턱을 낮추면 많은 영세자영업자들을 공식적인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라며 "현 시점에서는 재정안정보다는 고용보험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노력에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건 까다롭고, 실질 생계보장도 안돼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절차와 조건이 너무 까다롭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전문가들은 특히 경영상 필요에 따른 해고 등 비자발적인 이유로 실직한 경우에만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돼 있는 점을 지적한다.
파견업체 직원으로 인천의 한 대형 할인점에서 판매직 아르바이트 사원으로 6개월간 일했던 이신영(47ㆍ가명)씨는 관리자들과의 갈등으로 지난해 초 회사를 그만뒀다. 여직원들을 희롱하는 남성 관리자들의 행위를 사측에 고발하자 관리자들은 이씨를 따돌렸고, 근무조건이 열악한 매장으로 발령 냈다. 견디다 못한 이씨가"회사를 옮길 테니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비자발적 실직으로 처리해달라"고 요구했지만 회사측은 도리어"당신이 자발적으로 그만 둔 것인데 왜 실업급여를 받으려 하느냐"며 받아주지 않았다.
과도한 노동강도나 장시간 노동을 강요해 직장을 옮기거나 육아 문제로 직장을 옮긴 경우에도 사용자 대부분은 자발적 실직으로 처리한다. 고용부는 "자발적 실직에 대해 실업급여를 주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스웨덴 호주 일본 영국 독일 캐나다 등 대다수 국가는 자발적 실직에도 실업급여를 주고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자발적 실직과 비자발적 실직의 비율이 대략 6대 4인 상황에서 현재 고용보험기금 재원으로 자발적 실업자에게 실업급여를 주기 어렵다"고 말했다.
실업급여의 금액과 급여기간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현재 실업급여는 최저임금액의 90%(최저)부터 하루 4만원(최고)까지 최장 240일(8개월)간 받을 수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노동자 평균임금의 24~44% 수준이다. 노동자평균임금을 기준으로 독일은 90%, 네덜란드는 30~113%, 프랑스는 30~224%를 지급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다. 다른 나라는 수급기간도 최장 24개월(노르웨이, 포르투갈), 23개월(프랑스), 12개월(독일) 등 대개 1년 이상이다. 특히 독일, 프랑스 등 상당수 국가들은 실업급여 기간이 끝나도 실업부조를 받을 수 있다. 김은기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국고를 투입해 고용보험의 급여 수준을 높이고, 보험에 가입할 수 없는 청년층과 경력단절자들은 실업부조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정승임기자 choni@hk.co.kr
■ 고용부, 고용기금 주먹구구식 운용
고용노동부 예산에서 고용보험기금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올해 고용부 지출예산 12조6,180억원 중 고용보험기금에서 6조462억원(48%)이 쓰인다. 이런 비중에도 불구하고 고용보험기금이 고용안정과 직업능력개발이라는 기금 본래 목적으로 쓰이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고용보험기금은 노사가 절반씩 내는 실업급여 계정과 사용자가 전액을 내는 직업능력 계정으로 나뉜다. 실업급여 계정의 재정은 악화일로다. 지난해 이 계정에서 1조2,305억원의 적자가 나는 바람에 올해 실업급여요율을 0.9%에서 1.1%로 인상했다.
실업급여 증가와 함께 재정에 부담을 주는 것은 모성보호급여(육아휴직급여, 산전후 휴가급여 등)다. 올해 모성보호급여 예산은 4,946억원으로 실업급여 예산(4조1,077억원)의 12%선이다. 모성급여 도입 당시인 2002년 고용보험기금과 국고에서 절반씩 지원하기로 했으나 전체 예산이 20배 이상 늘어난 현재 국고지원은 100억원으로 첫해(150억)보다 오히려 줄었다. 모성보호사업은 보험료 납부자 뿐 아니라 국민 전체가 혜택을 입어 국고로 지원하는 게 원칙이지만 고용보험기금이 95% 이상을 감당하는 기형적 구조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육아휴직급여의 확대로 올해부터 2015년까지는 매년 694억~1,643억원의 추가 재정부담이 예상되고 있다.
'기금의 수익자 부담원칙'에 따른다면 모성보호급여 예산은 고용보험기금이 아니라 국고에서 지원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렇게 되면 모성보호급여에 쓰이는 보험기금을 실업급여 예산으로 돌려 현재 실업급여 대상에서 빠져 있는 '자발적 실업자'에게도 실업급여를 줄 수 있다. 한국조세연구원에 따르면 자발적 실업자들에게까지 실업급여를 줄 경우 소요예산은 5,729억원(50%가 신청시ㆍ2012년)으로 추산된다. 고용부가 국회에 제출한 2012년 모성보호급여예산이 5,541억원이므로 규모가 비슷하다.
직업능력계정은 상대적으로 재정이 안정적이지만 역시 국고로 추진돼야 할 사업들 상당부분에 기금이 투입됐다. 효과가 미심쩍은 '종합직업체육관(잡월드)'건립에 2,007억원(2006~2011년), 전형적인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인 지방고용센터 청사 매입기금에 5,500억원(2004~2008년)이 전용됐다.
이런 주먹구구식 고용보험기금운용은 고용부가 예산운영의 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 노동계의 시각이다. 고용정책심의원회가 기금 예산을 심의하도록 돼 있지만 이 위원회는 고용부 차관이 위원장을 맡고, 26명의 위원 중 노사대표는 각 4명에 불과하다. 전문가들도 제대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는 수십 개의 '고용보험사업'을 평가하는 기관의 필요성도 수년째 제기돼 왔으나 고용부는 이 기관 설치에 올해 겨우 7억원 안팎의 예산을 책정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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