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는 1989년'연방군 해체'를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냉전 종식에 맞춰 인구 대비 이스라엘 다음으로 많은 군 병력을 줄이거나 아예 없애자는 시민운동이 국민투표를 청구했다. 다수 여론은'군 해체'주장을 신성한 국가제도의 부정으로 여겼다. 의회 모든 정치세력도 반대했다. 군 장성들은 투표 결과 80% 이상 반대하지 않으면, 집단 퇴역하겠다고 위협했다.
투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투표자의 36%가 군 해체에 찬성했다. 19~34세 징집 연령층의 찬성이 많았다. 과반수가 안돼 해체안은 폐기됐지만, 군 구조 조정이 불가피하다고 본 정치세력은 다양한 군 개혁안을 내놓았다. 오랜 논의 끝에 1995년, 상비군과 예비군을 합쳐 40만 명으로 병력을 크게 줄였다. 2001년 9ㆍ11 테러 직후 국민투표에서'군 해체'찬성은 22%로 떨어졌다. 그러나 2004년 새 개혁안을 국민투표로 채택, 군을 22만 명으로 더 줄였다.
사회적 토론과 타협이 핵심
스위스는 국가와 지방의 주요 정책을 주민투표로 결정하는 대표적 풀뿌리 민주주의 국가다. 연방과 주(canton) 단위에서 한 해 수십 건 주민투표를 한다. 기초자치 수준에서는 몇 천 건에 이른다. 스위스를 벤치마킹한 미국보다는 적지만, 나라 크기를 생각하면 단연 으뜸이다. 1990~2000년 전세계에서 실시된 전국적 주민투표의 절반이 유럽(248건), 그 절반(124건)이 스위스에서 이뤄졌다.
인구 800만이 안 되지만 잦은 주민투표에도 민주정치가 잘 운영되는 요인은 뭘까. 핵심은 주민투표가 단순한 표결에 그치지 않고, 투표전 토론과 투표후 조정(adjustment)의 정치과정이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데 있다.
투표전 토론은 의회와 행정부의 정치엘리트 집단이 정책 쟁점을 논의하는 단계부터 적극 협력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의회나 정부안이 의무적 주민투표를 통과할 가능성을 높이고, 선택적 주민투표 청구를 줄이기 위해서다. 또 주민투표에 앞서 정확한 정보 제공과 적극적 투표 권유로 활발한 토론과 여론 형성을 이끈다.
한층 중요한 것은 투표후 조정이다.'군 해체'이슈에서 보듯, 다수결로 승부를 가리는 게 전부가 아니다. 주민투표로 나타난 유권자의 뜻, 소수의견을 정확히 가늠해 정치과정에 반영하는 노력과 타협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대립과 갈등을 완화, 사회 평화와 정치 안정을 이뤘다는 평가다.
스위스의 직접민주제는 무엇보다 정치세력의 이기주의와 기회주의를 견제한다. 가장 강력한 주민 참정권인 주민투표는 정치엘리트 집단의 이기적 카르텔을 허물어 정치엘리트와 시민, 의회 및 정부와 유권자의 상호 신뢰를 높였다. 또 여러 실증적 연구에 따르면, 공공서비스 비용과 조세 저항 및 탈세를 줄이며 법과 정책 순응도를 높인다.
주민 참정권 확대는 국민의 정치적 효능감과 행복감을 높인다는 연구도 있다. 주민투표가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소득 향상보다 훨씬 크다고 한다.'행복학'과 맞물린 이런 평가는 세계적인 주민 참정권 확대와 무관치 않다. 우리도 국민참여 민주주의를 표방한 지난 정부에서 주민투표법을 만들었다.
서울시의 무상급식 지원에 관한 주민투표는 제대로 된 첫 실험이다. 그러나 사회적 타협과 평화, 행복 등과는 거리 먼 모습이다. 정치집단과 언론이 무상급식 범위와 예산 지원을 놓고 선과 악의 판단과 선택을 강요하는 탓이 크다. 복지 정책이 대개 그렇듯 무상급식 범위도 유권자와 납세자, 사회 전체가 진지한 토론을 거쳐 타협하고 선택할 문제이다.
민주당과 오세훈 대결 아니다
전면 무상급식, 보편적 복지가 유일한 정답이라고 고집하는 이들은 "오세훈을 편든다"고 욕할 법하다. 출발이 어떻든 정치세력과 개인의 승패와 장래는 본질이 아니다. 또 유아보육에서 대학교육까지 무상으로 하는 유럽의 보편적 복지국가들도 대개 급식비는 부모 소득에 따라 여러 단계로 차등 징수한다. 왜 그런지, 이제라도 열심히 토론하는 것이'행복한 주민투표'를 위한 길이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