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조오련이 하고 바다거북이 하고 수영 시합하면 누가 이기는지 아나?" 영화 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중 하나이다. 지금이야 '수영'하면 박태환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조오련을 빼고 한국 수영을 얘기할 수는 없다.
1980년 8월 11일 오후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 대한해협의 높은 파도를 헤치고 일본 대마도 북서지역에 위치한 소자끼 등대에 안착했다. 부산 다대포 방파제를 출발한 지 13시간 16분 10초 만의 일이었고, 그의 나이 겨우 29세 때였다. 당시 조오련은 아시아 수영계의 슈퍼스타였다. 선수생활을 통틀어 한국신기록을 50회나 깨뜨렸고 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는 자유형 400m와 1,500m 경기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 최초로 수영에 금메달을 안겨주었다.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조오련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상경해 청계천의 간판가게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YMCA 수영장에 등록을 했다. 69년 전국체전 서울 예선에서 수영복도 없이 사각 팬티만 입고 출전해 1위를 하자 양정고가 스카우트 했다. 이 경기를 계기로 태릉선수촌에 들어간 조오련은 물 만난 고기마냥 출전하는 경기마다 한국 기록을 새로 썼다.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접은 후에도 도전은 멈추질 않았다. 대한해협 횡단 이후에도 82년에 도버 해협, 2003년엔 한강 600리를 완주했으며 2003년 8월 12일에는 두 아들과 함께 울릉도 관문 도동항 앞바다를 출발해 18시간을 헤엄쳐 울릉도-독도 횡단에 성공했다. 조오련과 해군 UDT 출신의 장남 성웅씨,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국가대표 수영 선수가 된 차남 성모씨가 번갈아 바닷길을 건너 영토의 상징인 독도 상륙에 성공한 것이다. 마중 나온 독도경비대로부터 태극기를 건네 받은 이들 부자는 힘차게 만세3창을 불렀다.
나라를 사랑하고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던 조오련은 2009년 8월 해남의 자택에서 심장병으로 쓰러져 숨졌다.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을 기념해 2차 횡단을 위한 연습을 하던 중이었다. 국민에게 기쁨과 희망을 안겨줬던 조오련이 남긴 삶의 의미가 최근 독도 문제가 불거지면서 더욱 각별해지는 것은 왜 일까.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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