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심 기행'흔들리는 텃밭' 부산·경남 민심 르포
내년 4월 총선을 8개월 앞두고 여야 각 정당의 텃밭들이 흔들리고 있다. 한나라당의 전통적 강세지역이면서도 이상 기류가 심상치 않은 부산∙경남(PK)지역을 먼저 찾았다. PK지역에서는 부산저축은행과 한진중공업 사태,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지역 경제 침체 등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민심이 요동치고 있었다.
부산 대진동에서 자영업을 한다는 황모(48)씨는 "'영남정권'은 무신. 해준 게 뭐가 있다고"라고 불만을 쏟아냈다. 부산에서 시작해 김해 창원 마산 밀양 등을 거치며 필부필부들이 토해내는 정제되지 않은 숨결을 들어봤다. PK지역은 최근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에도 문을 열어주긴 했지만 1990년대 이후 전통적인 한나라당(구 민자당, 신한국당 포함) 텃밭이었다. 그랬던 PK지역의 주민 상당수가 "예전과는 더 많이 다를낍니더"라고 말하면서 '한나라당 천하'의 변화 가능성을 점쳤다. 그러면서도 내년 대선 전망과 관련해선 "롯데(야구)외엔 관심 없심니더"라는 주민들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야기엔 귀를 쫑긋 세웠다.
"한마디로 더럽지예. X판입니더." 지역 경기를 묻자 돌아온 반응들이다. "바닥입니더"유의 답은 점잖은 축이었다. 이현희(55ㆍ부산 사직동)씨는 "6ㆍ25전쟁통에도 맨주먹으로 일어선 곳이었는데…"라며 입맛을 다셨다.
가지급금 지급 공고문 등이 덕지덕지 붙은 초량동 부산저축은행본점. 불볕더위에도 굳게 내려진 철제 셔터문 앞에서 70대 피해자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부산 민심을 엿볼 수 있었다.
"나머지 돈은 언제 준다 카더노." (박모씨)
"아무도 모른다 카던데예. 우리나라 X판 아입니꺼."(손모씨)
"할마시(할머니)가 묵고 살끼라고 돈 벌려고 다니는데 돌아삐겠다. 한나라당을 내가 얼마나 밀어줬는데 이래도 되나."(박씨)
이런 정서 때문인지 한나라당 부산 지역 국회의원 상당수는 요즘'지역 상주 체제'를 가동하고 있다. 한 초선 의원은 "서울은 바라보지도 않고 모든 활동을 부산에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앞도 을씨년스럽긴 매한가지. '맛자랑길' 음식점 대부분은 문을 닫았고, 두루치기집만 일부 노조원들의 '아지트'가 돼 있었다. '희망버스' 등 야권의 움직임에 대해선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전환점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반응도 있었지만 다수의 지역 주민들은 "제발 고마(그만) 해라 카소"라고 호소했다.
38년 부산 자갈치시장을 지켰다는 상인 이모(68)씨는 "갑오징어 한 박스가 28만5,000원까지 올랐소. 50년 만에 처음이라카데. 싸면 많이 팔아서 마진을 남길 낀데…" 라고 말했다. 마산 자산동의 한 슈퍼 주인은 "대통령 자신은 잠도 안 자고 뭐라고 할라고는 하는데…, 우리들은 서민 노릇하기가 참 힘듭니더"라고 말했다.
창원공단의 한 철판절단업체 간부는 한숨을 쉬면서"죽을 지경입니더. 철판때기 잘라 먹고 사는데 보이소, 요즘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안 들립니다"라고 말했다.
부산∙창원=장재용기자 jyjang@hk.co.kr
■ "야당도 아직 못믿겠고… 결국 누가 후보 되느냐가 관건될 것"
부산∙경남(PK) 지역에서 팍팍해진 살림살이와 서민들의 불만은 내년 총선 표심에서도 그대로 드러날까.
한나라당과 야당 사이에서 고심
마산에서 만난 김모(45)씨는 '그래도 한나라 텃밭 아니냐'는 기자의 물음에 고개부터 흔들었다. "(한나라당에 대한 민심이) 마이(많이) 틀어졌을 낀데예. 곳곳에서 요금 올라가는 소리밖에 없다 아입니꺼."
부산에서 택시를 모는 유성열(65)씨는 "충청도 보이소. 한 곳으로 안 몰아주니깐 세종시고 과학벨트고 다 가져갔다 아입니꺼. 부산에서도 민주당도 몇 석 나오고 해야 됩니더"라며 '정치 현실론'을 꺼냈다. 그는 "그 누꼬 부산 사하구의 민주당 의원은 항상 지역구 주민 본다카데. 그라니 민주당인데도 재선까지 안 해묵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에 대한 실망감이 곧장 야권 지지로 이어질지를 두곤 회의적 시각이 만만치 않았다. 한국일보와 한국리서치의 4월과 6월 여론조사에서도 PK지역에서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51.8%에서 41.1%로 떨어졌으나 민주당의 지지도는 15.1%에서 17.9%로 오르는 데 그쳤다.
부산의 한 자영업자는 "노무현이 한미 FTA 추진했는데 왜 민주당 지들이 반대하는데.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지금은 뭐라 캐도 선거 닥치면 다를 끼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도 10년 했는데 보수 정권도 10년은 해야 안 되겄나"라고 말했다. "야당에 인물이 없어서 하루아침에 싹 바뀌진 못할끼라예"(60대 슈퍼마켓 주인)라는 의견도 있었다.
민주당 부산시당 관계자도 "야권이 후보를 단일화해도 막상 선거 들어가면 당선권은 어렵다"면서도 "4대6, 상황 좋은 데는 45% 득표율까지 나올 것이다. 그러면 무소속이 10%만 가져가도 뒤집을 수 있다"는 계산을 내놓았다.
한나라당에 대한 애증과 야당에 대한 불안감 사이에서 PK 주민들은 "결국 누가 후보가 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한 40대 자영업자는 "이명박 대통령이 '왜 한나라당엔 안희정 같은 사람이 없노'라 했다지예. 한나라당도 이제 나이 드신 분은 조금 배제하고 젊은 정치인을 마이 내놔야 합니더"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무소속ㆍ진보 진영 총선 전망 엇갈려
2008년 총선 때 부산을 흔들었던 무소속 돌풍이 이어질지도 궁금했다. 특히 수영구나 연제구는 이 대통령의 측근들의 출마설이 나도는 곳이다. 지난 총선서 친박계 무소속을 찍었다는 한 수영 주민은 " (대통령 참모 출신은) 별로이고 친박 무소속 나오면 또 찍어줄 끼라예"라고 말했다. 반면 전모(69)씨의 생각은 달랐다. "야당이 잡았을 때 더 잘한 게 뭐가 있노. 대통령 참모 지냈으면 일도 잘할 꺼 아이가."
경남은 민주노동당 지역구 의원을 둘이나 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보 진영에 대한 평가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야당이 또 될 수는 있지만 권영길씨야 특출한 사람이고 아무나 들이민다고 되지는 않을 끼라예"(창원 40대)
"박근혜가 안 있나"… 문재인은?
부산저축은행 인근 직장인 박모(36)씨는 "총선은 인물을 보고 찍겠지만 대선 때 박 전 대표 찍는 것은 당연한 것 아입니꺼"라고 말했다. 박씨처럼 한나라당을 비토하던 주민들도 박 전 대표 이야기가 나오면 말하는 톤이 달라졌다. 밀양의 한 주민도 "그 분이 나오면 확 달라지지예. 적어도 약속은 지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더"라고 말했다.
반면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대선에 출마할 경우에 대해 묻자 택시기사들은 "그 얘기는 못 들어봤는데예. 서울에서나 하는 이야기 아입니꺼"라고 입을 모았다. 문 이사장의 모교인 경남고 출신이라는 한 50대 자영업자에게 '고교 선배 찍을 것이냐'고 물었더니 "문재인은 안 찍지. 요번에는 박 대표가 꼭 해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친노 그룹의 근거지인 김해에선 "노무현 사람 찍어줘야지예"(30대 후반 공무원), "김태호처럼 새 인물을 키워야 됩니더"(40대 초반 고깃집 사장)로 갈렸다.
물론 대학이 밀집한 부산 용소삼거리에서 만난 동명대 학생 전모(25)씨처럼 "특전사 출신에 노 대통령 곁을 지킨 사람이 대통령 되면 좋지예"라는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상당수 대학생들은 "문재인이 누군데예"라고 되물었다. 경남대 학생 김종대(23)씨는 "우리 어무이(어머니) 등 좀 펴시게 등록금이나 깎아주이소"라는 말을 남긴 채 서둘러 도서관으로 향했다.
부산·창원·김해·밀양=장재용기자 jyjang@hk.co.kr
■ 유기준 한나라 부산시당위원장 "물가·저축은행 사태로 부산 민심 훨씬 나빠져"
한나라당 부산시당 위원장인 유기준(사진) 의원은 7일 한국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내년 4월 총선과 관련해 "물가난이나 저축은행 사태 등으로 인해 한나라당에 대한 부산 민심이 이전보다는 훨씬 좋지 않은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지지세가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전과 달리 상당한 경각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관심이 없다면 아예 말씀을 안 할 텐데 질책을 하는 것은 한나라당이 잘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아직은 한나라당이 다시 부산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정서는 있다고 본다."
-공천 '물갈이'에 대한 입장은.
"인위적으로 물갈이를 한다든지 세대교체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정치권에서 발생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야권 후보 단일화가 이뤄지거나 한나라당 성향 후보가 난립할 경우 만만치 않은 승부가 예상되는데.
"(민주당과의) 경쟁 구도를 통해 한나라당이 시민들에게 좀 더 사랑을 받을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시민들 지지를 받는 게 중요하지 (야권이) 인위적인 정치구도를 만들어서 선거에 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내년 총선에서 박근혜 전 대표의 역할론이 나오는데.
"내년 총선과 대선 일정이 이어지기 때문에 결국 총선이 잘 돼야만 대선 승리로 가는 디딤돌을 마련할 수 있다. 박 전 대표도 차기 대선에서 굉장히 유망하게 거론되는 만큼 내년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 지원 방안을 생각해봐야 한다."
-한진중공업 사태에 대한 입장은.
"노사 문제는 기본적으로 자율적인 해결에 맡겨야 한다. 정치권의 과도한 개입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사회 문제로 비화했기 때문에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청문회에 나와서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소상히 밝히고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
장재용기자 jyjang@hk.co.kr
■ 과거 선거에서 보여준 야권 위력
부산ㆍ경남(PK) 지역은 대표적인 한나라당 텃밭이지만 과거 전국단위 선거에서 비(非) 한나라당 후보들이 '이변'을 연출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부산 사하을에 출마한 열린우리당 조경태(사진) 후보는 한나라당 최거훈 후보를 꺾고 당선됐고, 경남 김해갑에선 열린우리당 김맹곤 후보가 한나라당 김정권 후보를 눌렀다. 이 지역 한나라당 불패신화가 본격적으로 요동치는 신호탄이 됐다.
4년 뒤인 18대 총선에선 비(非) 한나라당 출신 당선자가 더욱 늘었다. 특히 한나라당 공천 경쟁에서 탈락한 친박 성향 무소속과 친박연대 후보들이 돌풍을 일으키며 대거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부산의 경우 18개 선거구에서 한나라당 후보는 11명만이 당선됐는데, 친박연대나 무소속 후보들은 한나라당내 친이ㆍ친박계 다툼에 따라 갈라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한나라당의 승리였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이들 외에도 '리턴매치'가 벌어진 부산 사하을에서 민주당 조경태 후보가 한나라당 최거훈 후보를 제쳤고, 경남 사천에선 민주노동당 강기갑 후보가 한나라당 이방호 후보를 꺾었다. 경남 창원을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경남 김해을에서는 민주당 최철국 후보가 각각 당선되면서 한나라당 텃밭에서의 이변을 이어갔다.
여기에 지난해 6ㆍ2 지방선거에서는 경남지사에 출마한 무소속 김두관 후보(53.5%)가 한나라당 이달곤 후보(46.5%)를 이겼고, 부산시장 선거에선 민주당 김정길 후보가 현역 시장이었던 한나라당 허남식 후보에게 패했지만 44.6%의 비교적 높은 득표율을 나타냈다.
앞서 두 차례의 대선에서도 이 지역은 한나라당 후보에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부산에서 29.6%, 경남에서 26.7%의 득표율을 올리며 선전했다. 결과적으로 이 지역의 약진이 대선의 결정적 승인이 됐다.
1997년 15대 대선 당시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도 부산(29.8%) 경남(31.3%)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득표율을 보여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발목을 잡았다.
신정훈기자 h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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