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최고 등급인 '트리플A(AAA)'를 받아 온 국가는 미국을 비롯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19개국(S&P 기준)이다. 하지만 같은 최고등급이라도 미국에 부여된 '트리플A'는 차원이 달랐다. 정치ㆍ경제ㆍ군사ㆍ문화를 아우르는 미국의 '슈퍼 파워'를 대변하듯, 지금껏 단 한 번도 강등을 의심한 적이 없는 '슈퍼 AAA'였다. 미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는 '무위험 자산'의 동의어이기도 했다. 그래서 5일(현지시간) 국제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앤푸어스(S&P)가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A+'로 한 단계 강등한 것은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을 뒤바꿔놓을 만한 일대 사건인 셈이다. *관련기사 4ㆍ5ㆍ15ㆍ18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 가까이 유지해 온 슈퍼 파워 미국의 달러 패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원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신용등급 자체는 굳건했다. 여기엔 '언제든, 원하는 만큼 찍어낼 수 있는' 기축통화인 달러화의 위력이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대규모 달러를 찍어 적자를 메우는 미국의 위험한 폭탄 돌리기가 지속된 결과, 막다른 재정적자 상황에까지 내몰린 것이다.
S&P는 전격적인 등급 강등의 배경으로 "미국이 부채상한 증액 협상을 타결했지만 증세(增稅)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재정적자를 줄이는 데는 충분치 못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더 이상 미국의 달러, 그리고 미국 정부가 찍어낸 국채가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이 아니라는 점을 공식화한 것이다. 세계 최대 채권운용사 핌코의 무하메드 엘 에리언 최고경영자(CEO)는 6일 파이낸셜타임스(FT) 칼럼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이 AAA 등급을 잃게 된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 없었다"며 "미국 신용등급 강등이 새로운 금융시대의 서막을 열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이번 조치가 달러의 급격한 몰락을 초래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달러 패권의 급격한 붕괴가 몰고 올 금융시장의 대혼란은 유럽, 일본, 중국 등 다른 국가들도 달가울 수 없는 데다 딱히 현실적인 대안도 없는 탓이다. 유럽, 아시아 및 중동의 중앙은행들이 "미 국채 보유를 지속할 것이며 달러는 여전한 핵심 기축통화"라고 밝힌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앞으로 달러 패권의 균열이 점점 더 커질 것은 분명하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1조달러가 넘는 미 국채를 보유 중인 중국의 관영 신화통신은 7일 "미국이 빚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자기 능력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상식을 재정립해야 한다"며 "세계 최대의 미 채권 보유국인 중국은 달러화 자산의 안전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 아사히신문도 이날 "미국 사상 첫 신용등급 하락은 70년간 지속돼 온 달러 기축통화 체제 몰락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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