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1984~1987 1·2/마르제나 소바 지음·실뱅 사부아 그림/세미콜론 발행·각 150쪽·각 1만2,000원
엄마가 다급하게 나를 찾는다. 아프지도 않은 나를 차에 태워 병원에 데려간다. 날이 더워 숨 막힐 지경인데도 병원 문과 창문은 모두 닫혀있고, 복도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한참 기다린 후 받은 노란 물약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셨다. 약이 부족해서 아이들만 먹고 어른들은 못 먹었다. 그날 이후 어른들은 뉴스를 꼭 챙겨봤다. 온통 독구름 이야기다. 밖에 나가 놀 수도 없고 우유 먹는 것도 금지됐다. 버섯을 따러 가면 안되고 과일도 오래 끓여 먹어야 한다. 사람들은 우리 같은 아이들을 '체르노빌 세대'라고 불렀다.
2권으로 출간된 르포 만화 <마르지 1984~1987> 는 저자 마르제나 소바(32)가 1980년대 폴란드 공산주의 체제의 마지막 시기에 유년기를 보낸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저자는 중산층 가정의 7세 소녀 마르지의 눈을 통해 1984~87년 폴란드 현대사를 짚는다. 마르지>
평소와는 달랐던 어른들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전사고처럼, 아이의 눈에 비친 공산주의 체제 하 폴란드의 역사 현장은 일상적이고 구체적이다. 예컨대 물자배급은 소녀 마르지에게 수치의 순간이자 삶의 목표, 그리고 아버지의 굴욕이다. 한 겨울에도 추위에 싸워가며 과일과 고기를 배급 받으려 밤새도록 줄을 선다. 여섯 개씩 끈으로 묶어 배급하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저도 볼일을 보는 사람입니다'라는 딱지가 등에 붙은 것마냥 부끄럽다. 기름 배급표를 깜박한 아빠가 기름을 달라고 주유소 직원에게 통사정을 하지만 '자기가족만 생각하고 나라와 다른 사람 생각은 안 하는 거짓말쟁이'로 취급 받는다.
80년대 동유럽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폴란드 첫 민선 대통령 레흐 바웬사(68)의 자유노조 운동도 마르지의 눈에 인상적으로 남았다. 어른들은 TV와 집안 불을 끈 채 촛불을 밝힌다. 바웬사라는 사람이 나와 말을 하면 모두 눈을 반짝이며 웃음을 터트린다. 사람들은 "우린 정상적으로, 존엄하게 살고 싶다"고 구호를 외친다. 어린 마르지의 생각에도 "이게 지나친 바람인가" 싶다.
묵직한 역사적인 사건을 저자의 체험을 녹여낸 아이의 시선에서 그려 재미있고 쉽게 읽힌다.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담은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쥐> (아름드리 발행), 자신이 겪은 이란 혁명기를 그린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 (새만화책 발행)의 뒤를 잇는 르포 만화의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페르세폴리스> 쥐>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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