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데뷔를 앞둔 이모(37)씨는 4일 오전 서울 행당동의 한 극장을 찾았다가 뜻하지 않게 오랫동안 벼르고 벼르던 영화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를 아이맥스 3D로 볼 수 있었다. 당초 예정돼 있던 국내 블록버스터 ‘7광구’의 상영 시각이 이날 오후 5시 40분으로 늦춰졌기 때문이다. 이날 개봉한 ‘7광구’는 여느 영화와 달리 오전부터 극장에서 만날 수 없었다. 지난달 26일 언론 시사회 이후 드러난 문제점을 부랴부랴 수정하느라 정상적인 극장 개봉 시간을 놓쳐서다.
이 영화의 투자배급사인 CJ E&M 영화사업 부문 관계자는 “좀 더 나은 영화를 제공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으나 제작비 100억원대인 대작이 개봉 첫날부터 체면을 구긴 셈이다.
올 여름 시장 석권을 장담하며 호기롭게 개봉했던 충무로 블록버스터들이 잇달아 수난을 겪고 있다. 이미 개봉한 대작들이 거북이 흥행 행보를 보이고 있는 데 이어 개봉 당일 늑장 상영이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지난달 27일 나란히 개봉한 ‘고지전’과 ‘퀵’은 3일까지 205만명(영화진흥위원회 집계)과 186만명이 관람했다. 대작 영화가 개봉 2주 만에 올린 성적치곤 영 신통치 않다. 손익분기점을 향해 두 영화가 갈 길은 멀고도 멀다. ‘고지전’은 400만명, ‘퀵’은 300만명 정도를 넘어야 순익을 남길 수 있다. ‘7광구’가 개봉하고, 제작비 90억원의 ‘최종병기 활’이 10일 개봉 대기 중이라 ‘고지전’과 ‘퀵’의 흥행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질 전망이다.
올해 충무로 대작의 수난은 과당 경쟁 탓이라는 의견이 많다. 한 해 가장 큰 장이 서는 여름이라지만 100억원대 한국영화 3편이 흥행 대전을 펼치는 것은 결국 제살 깎아 먹기라는 것이다. 한 영화인은 “ ‘고지전’과 ‘퀵’이 맞대결을 벌이면서 초반 흥행몰이에 실패했다. 결국 서로의 발목을 잡은 셈”이라고 분석했다. ‘7광구’의 개봉 사고도 출혈 경쟁이 빚은 해프닝이라는 의견이 있다.
2007년과 2009년 여름 흥행 전선이 올해 시장에 암시하는 바가 크다. 2007년 ‘화려한 휴가’(688만명)와 ‘디 워’(786만명)는 일주일 간격을 두고 개봉해 쌍끌이 흥행을 이끌었다. 2009년 ‘해운대’(1,139만명)와 ‘국가대표’(809만명)도 일주일의 완충지대를 두고 ‘윈윈 흥행’을 거뒀다. 묘하게도 2007년 여름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트랜스포머’(742만명), 2009년엔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743만명), 올해는 ‘트랜스포머 3’(772만명)이 개봉해 충무로 대작들과 짧은 흥행전선을 형성했다.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403만명)의 예상 밖 흥행을 제외하면 시장 환경이 비슷했던 셈이다.
‘퀵’과 ‘7광구’의 투자배급사인 CJ E&M 영화사업 부문 관계자는 “대작 영화들이 쏟아지며 시장 확대를 꾀하고 관객들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만으로도 긍정 평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 영화제작사 대표는 “블록버스터는 일단 많은 수익을 올리는 것이 최대 목표”라며 “시장 확대 운운은 현실을 왜곡하는 아전인수식 변명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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