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인촌 "기관장 물갈이… 그분들에게 상처줬고 내게도 큰 상처로"
'기관장 물갈이' 사건, 숱한 '막말' 파문으로 '문제적 장관'에 꼽혔던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다시 권력의 언저리로 돌아왔다.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뒤 반년. 이번엔 대통령 문화특보다. 드라마 '야망의 세월'(1990년)에서 '이명박' 역을 맡으며 생긴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은 2002년 서울시장 당선자 인수위 참여와 서울문화재단 대표 취임으로 이어졌다. 현 정권 최장수(3년) 장관까지 지냈으니 'MB의 남자'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유인촌 특보를 지난달 30일 서울 청담동에 있는 그의 극장 '유시어터' 근처에서 만나 장관 시절 일들과 향후 진로 등에 대해 들었다. "팔자가 되면 하겠지만"이라며 그는 정치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었다.
-장관 끝나고 무슨 일 했나.
"예전에 '쉼터'에 가서 가출한 청소년들 만나고 명동예술극장도 데리고 가서 연극도 같이 보고 한 적이 있다. 퇴임 후 뭘 할까 생각하다가 쉼터는 워낙 뿔뿔이 흩어져 있어 소년원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한 달은 힘들더라. 우선 애들이 금방 잘 믿지를 않는다. 이 사람 그냥 한 번 왔다 가는 건지 정말 뭐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거지. 그런데 한 달 지나면서부터 좀 (마음이) 터지더라. 거의 일주일에 네 번씩 갔다. 짧고 진하게 아이들을 만나 그렇게 해서 결과를 보고 싶었다. 아이들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가 확인하려고 그렇게 3개월을 처음 한 달은 일주일에 한두 번 가다가 뒤에 두 달은 일주일에 네 번, 오후 2시 가서 저녁 9시 애들 취침 전까지 밥도 애들하고 식당에서 같이 먹고 그랬다."
-연기 지도 한 건가.
"연극놀이라고 이야기해야겠지. 그런 거 통해 애들을 여러 가지 사회적으로 경험시킨 거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롤 플레이' 같은 것, 역할을 서로 바꾸어보는 거다. 거기에 장관도 나오고 경찰도 나오고 깡패도 나오고. 그러니까 여러 인물이 나오는데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해보면서 자기를 바라보게 하는 거다. 뭔가 애들이 잘 집중이 안 되고 산만하고, 그래서 사회적인 경험을 그런 극을 통해서 했다. 예술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기능을 적용해 본 것이다."
-조직화해서 확대해 볼 만하겠다.
"특히 청소년 문제라서 정말 'NGO' 역할 제대로 해봐야겠다 생각해서 준비를 했다. 전국에 소년원 10개가 있는데 지역마다 그 지역 예술가들이 책임져서 같이 프로그램 만들고, 어떤 식으로 아이들하고 만날까 그런 전체적 준비는 내가 하고 그 다음에 각 지역에 있는 분들과 잘 네트워크를 만들어 그 분들이 할 수 있도록 하는 거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특보 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도 진도는 나가야 하는 거라서 8월까지 준비해서 9월부터 이런 '재능기부' 예술가들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이미 정말 조용히 그런 일 하시는 분들 굉장히 많아 깜짝 놀랐다."
-대통령 특보로 다시 문화정책에 간여하게 됐다. 어떤 역할 하나.
"말 그대로 보좌역이다. 정책 만든다든가 일 집행하기는 힘들고 문화부가 잘 갈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역할밖에 못할 거다. 자유롭게 문화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 보고 여러 의견을 대통령, 부처에 전달하는 거다."
-특보로 장관 때 하던 고민을 이어서 할 텐데 뭘 해보고 싶나.
"문화란 게 참 성과 내기 힘든 분야다. 문화적인 불균형, 경제적 차이로 문화적 혜택을 덜 받는 그런 부분 해소하는 게 우선 관심 사항이다. 서울과 지방 차이 많이 이야기 하는데, 서울에는 많은데 지방은 없는 거 많다. 강원 산골에서도 국립ㆍ공립단체 공연 볼 수 있도록 하는 건데 예산, 사람 그런 게 정말 중요하다. 예산을 좀 더 달라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한다. 그 다음은 예술가들 문제인데, 특히 순수문화는 최저임금 최저생계 벌이도 안 되는 경우 있는데 그런 문제 해결되지 않으면 창작이 계속 되기 힘들다. 예술가 지원 제도는 현장을 정말 많이 알고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 순수가 붙은 거 전통이 붙은 거는 상업적으로 해결이 안 된다. 연극, 국악, 무용, 음악 이런 부분들은 국가가 안전판을 만들어야 한다."
-장관 오래 해서 정치랄지 지자체장이랄지 기회 놓친 거 없나.
"나는 일 중심으로만 생각했다.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다. 정치적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욕도 안 먹었을 거다. 성질이 급하기도 하지만 호ㆍ불호가 분명해서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된다, 그런 식이다. 항상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기사가 났다 하면 난리가 났다. 나는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는 건데."
재판에서 그 분들이 다 이겼다
그러면서 그가 꺼낸 이야기는 장관 취임 초기부터 불거진 산하 기관장 '물갈이' 사건이었다. 유 특보는 2008년 3월 장관 취임 후 첫 외부 강연에서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나름의 철학과 이념, 자기 스타일과 개성을 가진 분들로 그런 분들이 새 정권이 들어섰는데도 자리를 지키는 것은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뒤집는 것"이라고 사실상 기관장 교체를 선언했다. 그 중 김정헌 당시 한국문화예술위원장,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등은 사업 부실, 개인 비리 등을 이유로 내쫓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해임 무효 소송을 벌여 승소했다. 유 특보의 뒤를 이은 정병국 현 문화부 장관이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사과까지 포함해 그분들과 충분히 대화하고 생각을 들어보겠다"고 할 만큼 현 정권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내가 서울문화재단 대표 할 때 시장이 바뀌고 임기가 몇 달 남았다. 새 시장이 와서 첫 회의 갔을 때 먼저 있던 사람은 나가 주는 게 좋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새로운 사람끼리 새로운 이야기하면서 꾸미는 게 낫겠다,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면 지난 이야기 안 할 수 없고 지난 사람이 앉아 있으면 우물쭈물 하면서 진도가 안 나갈 거다, 그래서 자리를 비켜주는 게 좋겠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런 얘길 한 거다."
-그럼 등을 떠민 게 아닌가.
"(언론에서 크게 다루고 해서) 한 번 터지니까 걷잡을 수 없게 됐다. 계속 그리로 달려가는 거다. 모든 것에 싸움이 붙기 시작했다. 그거 가지고 변명은 안 한다. 항상 일 중심으로 이야기했지, 과연 일이 제대로 되느냐 안 되느냐, 안 되면 안 되는 거라고 이야기했으니까."
-일부 기관장들은 법정 소송까지 벌였다.
"재판에서 (내가) 다 졌다. 그 분들이 다 이겼다."
-돌이켜보면 어떤 생각 드나.
"정부가 바뀌고 자리가 잡히기 전에 너무 빨리 그런 일들이 크게 터져버렸다. 물론 내 실수도 있다. 그런 거 잘 몰랐으니까. 너무 솔직하게 난 편안하게 이야기한 거다. 그 분들하고 이야기도 충분히 했다. 오자마자 바로 쫓아낸 게 아니다. 충분히 일하면서 맞춰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분들한테도 상처고, 나한테도 상처다. 세월이 지나고 좀 더 나이도 먹고 되돌아 볼 수 있을 때 다시 한 번 잘 정리할 수 있을 거 같다. 지금은 꺼내면 꺼낼수록 상처가 덧나. 그래서 잘 이야기 안 한다."
-재판 결과 나오고 당혹스러웠을 거 같은데.
"그런 점 있었다. 일 처리 잘못한 거도 있고 행정적인 절차가 굉장히 중요한 건데 당시에는 그걸 잘 몰랐다. 그런 여러 가지 실수가 있는 거다. 기관장 문제는 그냥…. 이야기 해 봐야 서로 자기 변명 해야 하고 나는 옳았다고 이야기해야 하고 또 상대를 깎아내려야 하고, 이러면 또 시작이 된다. 그래서 더는 그런 이야기 안 한다. 서로 다 잘 아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터지니까 그렇게 되더라고."
정치, 그런 거 할 팔자 되면 하겠지만
-정치할 생각 없나.
"정치가 잘 안 맞는다. 싫으면 싫다고 얼굴에 다 드러나 잘 적응이 안 된다. 그래서 여러 가지 험한 꼴도 당한 거지. 모르겠다. 그동안 내 의지대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나는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서울문화재단 대표도 하게 됐고 그것도 인연이 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지만.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여태 이렇게 온 게 아니다. 그 부분(정치)도 그런 거 같다. 정치를 할 거냐 말 거냐 생각해 본 적 없다. 정치를 한다고 해서 총선을 나가고 이런 계획을 하지 않는다. 사실 연극도 다 계획 없이 한 거다. 정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정말 그런 거 할 팔자가 되면 하겠지만 지금은 준비하거나 만들고 싶지 않고 그럴 필요도 못 느낀다."
-대통령이라든지 주위에서 권하지 않나.
"대통령은 그런 얘기 절대 안 한다. 주위에서는 그런 소리 하는 사람 많지만, 난 초연한 편이다. 장관 끝나자마자 소년원 간 것도 쇼 하려고 한 거 아니다. 일절 주위에 말 안 하고 혼자서 했다. 3개월 지나니 애들이 나중에 아버지라고 하더라. 더 나이 들면 연기할 거다. 장관 하다 나왔는데 바로 돌아가 드라마하고 광고 찍어 돈 벌고 하면 체면이 말이 아닌 게 된다. 이 정부 끝날 때까지 돈 버는 일은 안 한다. 더 나이 먹으면 내 일 할 거다. 직접 연기보다는 연극의 사회적 기능 강화하는 역할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런 쪽으로 공부도 하고 있다."
-장관 하고 나서 팬들은 좋아하던 배우 한 사람 잃었다. 연기 욕심 없나.
"장관 마칠 때 현업 복귀는 3년 뒤에 하겠다고 했다. 지금은 배우보다는 공무원, 관의 냄새가 더 많기 때문에 공무원 때깔을 빼야 한다. 창작할 수 있으려면 3년 정도 몸 만들고 정신도 훈련을 해야 한다. 10월에 통영에서 열리는 철인 3종 대회 참가하려고 매일 트레이닝 하다 특보 발령 났다. 그래도 거긴 갈 거다."
-3년 뒤 복귀해도 국민배우일까. 세상의 절반이 싫어할 거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
"그런 우려는 안 한다. 우리는 조선시대부터 당파싸움 있었잖나.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다. 어차피 대중매체는 안 하고 연극만 하고 연극도 귀하게 하고 싶다. 서울서 안 하고 오지나 정말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데 가서 나무를 심는다는 생각으로 하고 싶다. 나 보고 싶으면 그리로 와라 하고 한 명만 오더라도 최굼?다하고 싶다. 그곳의 문화환경이 좋아지면 충분히 값어치 있다."
-새로 극장 만들겠다는 건가.
"근사한 극장 만들기보다 창고가 있다면 창고를 고칠 거고, 현재 있는 조건 아래서 할 거다. 지역의 문화예술회관 너무 크게 지어서 돈 몇 백억 쏟아 부었는데 콘텐츠도 없고 활용도가 떨어진다. 적극적인 활용인구 생각하면 더 작아져야 한다. 그런 모델이 될 수 있는 거 만들겠다."
이야기는 그를 양촌리 김회장 둘째 아들(용식)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기억하게 만든 이른바 '막말' 사건들로 이어졌다. 2008년 10월 국정감사 중 "사진 찍지마, XX. 찍지마. 성질이 뻗쳐서 정말" 발언을 비롯해 문화부 청사 앞에서 1인시위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학부모와 대화 중 "학부모를 왜 이렇게 세뇌를 시켰지, 누가" 등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그의 숱한 문제 발언들이 회자되고 있다. 최근 한 강연에서도 경복궁 담장이 낮아 '민비'가 시해 당했다는 말을 해 구설에 올랐다.
내가 덕이 모자라서 그런 거다
-유독 설화(舌禍)가 많았다. 가장 험한 꼴 당한 건 뭔가.
"뭐 다 험하다. 지금은 충분히 소화시킬 수 있는 여유가 있는데 그때는 왜 표현도 그렇고 직설적으로 되었는지. 지난번 강연('민비' 발언) 때도 그 자리에 있는 분들은 다 공감했다.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싫어했다면 바로 사과했을 거다. 몇 달 전부터 강연 약속된 건데 전날 특보로 임명이 돼 홍보자료도 나가고 해서 기자들이 많이 왔다. 끝난 뒤 30분 동안 기자들과 차 마시면서 일 잘 할 수 있도록 잘 써달라고 부탁했고 분위기 좋았다. 그런데 결국 그런 걸 꼬집더라. 두 시간쯤 이야기한 중에 딱 한 마디인데. 틀린 이야기 한 거 아니다. 내가 덕이 모자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인터넷 검색에서 '유인촌' 치면 관련 자동 검색어로 '찍지마'가 나온다.
"국회 출입하는 사진기자들이 너무 놀랐다고 하더라. 그때까지는 누구도 기자에게 찍지 말라고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단다. (내가)경험이 없었던 거다. 손만 까딱 움직여도 '파바박' 셔터가 터지니까 놀라서 '찍지마' 그렇게 된 거다. 결국 사과도 했고."
-문화부 앞 시위 갖고도 말이 많았다.
"문화부 청사 앞 1인 시위를 난 한번도 그냥 지나친 적 없었다. 직원들이 답답해서 장관이 뭐 그런 사람들한테까지 가냐고 그랬다. 나는 성격상 안 된다. 왜 왔느냐고 물어서 사실 뭔가 해결해 주고 싶었다. 내가 중앙대에서 가르쳤고 같이 예술하는 학생들이니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에게 동질감이 있다. 우리(예술하는)쪽 사람들이 그런 착각을 많이 한다. 그런 친근감 때문에 말실수도 많이 하고. '여기 왜 왔니, 집에 가라, 걱정하지마, 피해 안 가, 오지마' 하면 바로 인터넷에서 '반말 하지마' 그런다. 그렇게 이야기 하다 보니 '세뇌당했네' 하는 이야기까지 가는 거다. 본질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이다."
-조금만 더 참지 그랬냐.
"국민 대부분이 좋게 봐달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와 관계 없는 사람들도 열심히 했다는 평가를 해주더라. 반대편에서 밉게 보는 사람들은 뭘 해도 밉게 볼 수밖에 없다. 힘들게 어렵게 많은 문제도 만들고 시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궁극적으로 이 판 잘되게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고 이야기 많이 해준다. 세월이 지나면 충분히 다시 이야기되겠지."
◆인터뷰를 마치고
만날 약속을 잡을 때부터 그런 느낌이었지만, 올해 60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인촌은 정력적이었다. 장관에서 물러난 뒤 좀 쉴 만도 한데 3개월 동안 소년원 다닌 것도 그랬다. 그 아이들에게 뭔가 보탬 될 게 없을까 찾다가 연극을 통해 소통해 보기로 하고 한 일이다. 거기서 성과를 본 그는 다른 뜻 있는 재능기부 활동가들과 손 잡고 이를 전국 소년원으로 확대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그 일로 바빠서 인터뷰 하기로 한 날도 반나절 사이에 약속 장소를 세 번 바꿔야 할 정도였다.
그가 이야기한대로 '배우 유인촌'을 다시 보기는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지역의 문화격차를 해소하려는 소극장 작업을 하는 그를 만날 날은 있을 것이다. 이창동, 김명곤 장관처럼 결국 그가 마지막에 돌아갈 곳 역시 문화계고 연극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그는 그 전에 다른 일을 할 것 같다. 그가 '팔자'에 맡긴 정치 말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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