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한옥마을을 돌아 전동성당을 향하여 걸어가는데 회화나무 꽃이 툭, 툭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뙤약볕에 무슨 꽃이지?"라고 중얼거리며 나무를 올려보았는데 나는 회화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회화나무 꽃이 피었다 지는 시간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가끔 그리니치천문대 표준시에 맞춰진 사람의 시간이 필요 없을 때가 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운 시간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몇 시가 몇 분이 아닌 풍경의 시계, 풍경의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회화나무 노거수께서 자신의 꽃봉오리인 괴화(槐花)를 피우고 있는 일은 몇 번 친견하였지만 길게 뻗은 가로수길 따라 하늘에서 피고 땅에서 지는 회화나무 꽃의 시간과는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곳의 회화나무는 청춘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그 시간 위에 작렬하는 햇볕도 꽃과 잎 사이를 지나는 사이 어루숭어루숭한 푸른 그늘이 되어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나는 전동성당의 로마네스크 양식에 대해 말하려 가는 길이었지만 꽃의 시간 곁에 편안하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회화나무 꽃이 잘 익었습니다'는 한 줄을 얻었습니다. '여름이 잘 익었다'는 생각도 얻었습니다. '그 사이로 바람이 불어 가을이 첫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예감했습니다. 회화나무에 꽃 질 때 만나자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서둔다면 당신도 내일 새벽엔 아무도 걷지 않는 회화나무 꽃길을 걷고 있을 것입니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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