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술자리에서 소설가 김도언(39)씨는 흥미로운 게임을 제안했다. ‘끝말 잇기’였는데, 특정 키워드를 정한 뒤 그 키워드와 관련된 단어만 댈 수 있다는 조건을 단 것. ‘하늘’이라 정하면 하늘을 연상시키는 단어로만 끝말 잇기를 하는 식이다.
게임을 가장 달뜨게 하는 키워드는 무엇이었을까. 단연코 ‘섹스’였다고 한다. 세상의 기원이자 종말일 수 있으며, 에덴이자 소돔이기도 하며, 억압이자 해방, 혹은 입구이자 출구일 수 있는, 그것은 연상의 수레바퀴를 쉼 없이 굴리는 동력이라는 얘기다.
이런 연상 게임을 적용한 듯한 테마소설집이 나왔다. 기획자는 남성 작가 8명에게 ‘섹스’라는 키워드만 던졌다. “온몸에서 작가 ‘삘’이 충만한 작가라면, 마다할 리가 없었다”(김도언)는 말마따나 개성 강한 소장 작가들은 제 각각의 전지를 충전시켜, 에너지 넘치는 한 권의 소설집을 펴냈다. 섹스를 테마로 한 8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 (문학사상 발행)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 문단의 허리라고 할 수 있는 작가들이 펼쳐낸 상상력은 예상대로 천변만화의 구름 같다. 우선 김종광(40)씨의 ‘섹스낙서상-낙서나라 탐방기’는 섹스라는 기표를 이용, 배꼽 잡는 풍자의 세계를 선보인다. 인구의 70%가 매춘부인 섹스산업국가 율려국 최고의 문학상은 ‘섹스낙서상’이란 설정 아래, 종신심사위원의 행태와 수상작 선정 과정을‘율려국 섹스 문장의 혁명’식의 언어 비틀기로 맘껏 야유하고 조롱한다. 상업주의와 나눠먹기로 문학상의 권위가 추락한 현 문단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다.
‘손수레 벤츠’라는 흥미로운 조합이 등장하는 조헌용(38)씨의 ‘꼴랑’은 새만금 방조제 인근에 사는 노부부의 짠한 섹스를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담아 유머러스하게 그린 작품. 손수레 벤츠는 방조제에 출몰하는 카섹스족에 자극 받은 남편이 단장한 수레다. 그 위에서 부인은 능력은 시들었지만 여전히 욕구를 잃지 않은 남편의 은밀한 소망을 이뤄준다는 얘기. ‘꼴랑 그깟 게 뭐라구’라며.
김도언씨의 ‘의자야, 넌 어디를 만져주면 좋으니’에서 섹스의 대용물로 나오는 것은 의자다. 의자와 섹스를 나누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페티시즘적 욕망을 탐구하는데, 양성애자였던 주인공이 남녀 애인 사이에서 방황하다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 받은 뒤 의자에서 성적 위안을 찾는다는 얘기. 김종은(37)씨의 ‘흡혈귀’는 일자리를 잃은 평범한 가장을 위협하는 현대사회의 물신주의를 흡혈귀로 비유해 서민의 고단한 삶을 풀어낸다. 김태용(37)씨의 ‘육체 혹은 다가오는 것은 수학인가’는 섹스와 글쓰기 과정을 비교한 실험적인 소설이며, 은승완(43)씨의 ‘배롱나무 아래에서’는 남녀의 성기를 모두 갖고 있지 않은 채 배설 기능만 가진 한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섹스와 사랑의 관계를 탐색한다. 박상(39)씨의 ‘모르겠고’는 주인공이 일본 AV(성인비디오) 배우를 만나 지중해 산토리니 섬에서 환상적인 섹스를 나눈다는 이야기를 담았고, 권정현(41)씨의 ‘풀코스’는 르포 형식으로 안마방 등 여러 유형의 퇴폐적인 ‘방 문화’를 그린다.
섹스의 세계를 다채롭게 보여주는 이 소설집에서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성은 놀랍고 무거운 힘으로 사방으로 분출되고 충돌하고 소비되고 파괴된다”(권영민 서울대 교수)는 점이다. 섹스가 자글거리다 못해 끓어 넘치는 시대에, 섹스에 대해 여전히 할 말이 많은 것은 사람들이 그 단순한 교미 행위를 반복하면서도 지루해 하지 않는 것과 닮았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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