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나라의 신문과 방송을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가슴이 일렁이는 뉴스가 있다. 비극적인 3·11 일본 도호쿠(東北) 대지진 다음날 신문 1면 가득 붉은 일장기를 그려넣고 "힘내라 일본, 힘내라 도호쿠"라는 문장을 일어와 영어로 표기한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의 보도가 그랬다. 언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다시 일깨워준 일이었다. 1일 독도를 방문하겠다며 김포공항에 왔다가 추방된 일본 극우파 국회의원들을 보고 나서 우리 국민의 감정은 좀 달라졌지만, 마을 전체가 파도에 휩쓸리고 텅 빈 그 당시의 비극 앞에서는 그 어떤 사실보도와 수사조차 차라리 허무했다. 인디펜던트 1면은 언론이기 앞서 같은 시대를 사는 인간으로서 소통하는 것이었다.
최근 한국일보가 보도(7월29일자 16면)한, 9세 미국인 소녀 레이첼 베크위드가 목마른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하늘나라에서 자선모금을 벌인 기사도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극심한 물부족 때문에 수백만 명의 아이들이 5세도 넘기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레이첼은 '채리티:워터'라는 모금기관에 사이트를 만들어 가족과 친구들에게 "9번째 생일선물 대신 기부를 해 달라"고 깜찍한 요구를 했다. 그리고 목표액 300달러에 조금 못 미친 220달러를 모았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지난달 23일 죽기 전까지의 일이다.
9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레이첼이 생전 이렇듯 기특한 뜻을 품었었다는 사실이 지역 언론에 소개된 뒤 레이첼의 사이트는 다시 방문객을 맞기 시작했다. 이번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왔다. 터진 물줄기는 막을 길이 없어 지금은 70만 달러가 넘게 모였다. 기부자들은 보통 9달러를 냈고 "고맙다" "대견하다" "숭고한 뜻은 비극과 함께 온다"는 글을 남겼다. 이런 글귀만 읽고 있어도 기부의 물결이 퍼져나가는 장관이 느껴진다.
흔히 해외에서 전해져 오는 뉴스는 미국 부채상한 증액협상을 둘러싼 지루한 줄다리기나 장기화한 리비아 내전 같은 테러와 분쟁, 정치외교 기사들이다. 또는 게임을 하듯 무고한 이들을 총으로 살해한 노르웨이 테러리스트의 엽기적 행각 같은 기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나라에서는 심각해도 우리에겐 한 다리 건너 남의 나라 이야기이거나, 극단적인 사건으로 치부되는 보도들이다.
하지만 레이첼의 이야기 같은 보도를 볼 때면 우리는 인류의 연대감에 감동한다. 비극에 슬퍼하고, 힘든 일에 서로 돕고, 잘못에 함께 분노하는 인간의 모습은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왜 우리나라는 미국인들처럼 기부에 너그럽지 못한지, 어쩌다 교통사고로 죽은 소녀 없이는 이렇게 모금할 수는 없는 건지를 굳이 따질 수도 있겠지만 부질없다. 자발적으로 선행에 동참하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바로 거기 있기에.
뛰어난 지도자와 명사가 아니라 평범한 이들이 인간으로서 삶과 가치와 감정을 공유하고 행동함을 목격하는 것이야말로 국제 뉴스에서 가장 즐거운 발견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사악하고 흉포한 사건도 늘 일어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할 수는 없다. 사악한 범죄에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 때가 포기할 순간이다. 그 유대의식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김희원 국제부 차장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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