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금리가 연 12%나 되는 좋은 적금 상품이 나와서 소개하려고요." 서울 신대방동에 사는 회사원 정모(30)씨는 22일 직장 내 신한은행 출장소 소장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소장은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이율이 두 자릿수인 적금은 흔치 않다"고 강조했다.
정씨는 귀가 솔깃했지만, 실제 혜택을 따져보고는 가입하지 않기로 했다. 최고 금리를 받으려면 매달 카드 사용실적이 150만원을 넘어야 하는 데다, 월 적금 한도가 30만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정씨는 "카드로 연간 1,800만원 이상 써도 4%대 적금보다 더 받는 이자는 고작 14만원이었다"며 "결국 카드 실적을 올리려는 심보 아니냐"며 불쾌해했다.
최근 잇달아 등장한 고(高)금리 은행 적금 상품들이 금융감독 당국의 규제를 피해 관계사의 카드 영업을 변칙 지원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실상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 보너스 금리 혜택을 부풀려 소비자들을 현혹하고 있는 것이다.
31일 금융소비자연맹(금소연)과 금융권에 따르면 신한ㆍ국민ㆍ우리은행 등 국내 금융지주회사 계열 대형 은행들이 7월 이후 속속 새 적금 상품을 출시하면서, 카드 사용금액이 일정 규모 이상이면 금리를 추가로 얹어준다고 광고하고 있다.
신한은행이 22일부터 판매 중인 '생활의 지혜 적금 점프'가 대표적인 상품이다. 기본 금리는 연 3.2%에 불과하지만, 은행 거래 실적과 신한카드 '에스모어 생활의 지혜 카드'사용액수에 따라 추가 금리가 달라진다. 특히 월 150만원 이상 카드로 결제하면 우대 금리 연 8.1%포인트가 더해져 최고 금리가 연 12%까지 뛴다는 게 은행 측 설명이다.
문제는 이 카드의 주요 공략 대상인 20~30대 직장인들이 월 150만원 이상 쓰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또 높은 이율이 적용되더라도 적금 한도가 카드 사용금액의 5분의 1 정도로 턱없이 적다. 금소연 조남희 사무총장은 "20~30대 직장인들이 매달 150만원을 카드로 쓰고 여윳돈 30만원을 남기기도 쉽지 않다"며 "이런 사실을 은행이 잘 알면서도 관계사의 카드 영업 확대를 위해 기형적 금리 구조의 적금을 팔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은행이 최근 선보인 'KB 굿플랜 적금'은 월 150만원 이상 카드 사용 실적에 추가 금리 6%포인트(기본 4%)를 더해주며, 우리은행 '매직7 적금'도 월 42만원 가량을 카드로 결제하면 3%포인트 우대 금리를 제공한다. 계열 카드사의 마케팅 비용을 은행이 부담하는 구조라는 점에서 신한은행 적금 상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은행들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금융지주사 관계자는 "적금ㆍ카드 복합 상품 출시는 은행이 시너지 효과를 노려 자체 결정한 것"이라며 "영업점이 부족한 카드사의 영업을 은행이 대신해주고 판매 수수료를 받는 관행은 과거부터 있어왔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은행들이 이처럼 경쟁적으로 카드ㆍ적금 결합상품을 내놓는 것은 최근 강화된 정부의 카드 영업 규제를 피하려는 의도라는 게 금융전문가들의 시각이다. 특히 금소연은 ▦적금 금리가 아닌 카드 우대 금리라는 명목으로 비정상적인 고금리를 추가 제공하는 점과 ▦사실상 수혜자가 거의 없는데도 혜택을 과장해 소비자를 기만한 점 등이 불공정 영업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금소연 측은 "금융지주사들이 선진 금융 기법을 활용해 글로벌 영업에 나서기는커녕, 여전히 저급한 수준의 국내 영업전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해당 은행들을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금융감독 당국도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최근 카드 연계 적금 상품의 약관 재심사에 착수한 금융감독원은 해당 상품들의 불완전 판매 및 과장 광고 여부 등을 살펴보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이 적금들이 정부의 카드 규제 회피 수단인지에 대해서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권경성기자 ficci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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