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직후 시대상을 절묘하게 그린 대중가요로 1953년 강사랑 작사ㆍ박시춘 작곡에 현인의 노래로 발표된 가 있다. 1ㆍ4후퇴 때 흥남 철수 피란민 오빠가 북에 남은 동생 금순이를 그리며 다시 만날 때까지 굳세게 살아주길 바라는 내용이다. 2절에 나오는 오빠의 직업이 '국제시장 장사치'다. 부산 영도다리 인근 자유시장 터에 피란민이 몰려들어 온갖 중고ㆍ재고품에 미 군용물자까지 닥치는 대로 구해 팔면서 국제시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피란민들은 이른바 도떼기시장의 원조인 여기를 기반으로 억척스럽게 살아남았다.
■ 어디 국제시장뿐이랴. 맨몸으로 피란 나와 아무 가진 것 없던 이북 출신들은 전국 어느 곳이든 시장에 먼저 터를 잡았다. 밥장사, 노점 등으로 시작해 돈을 모아 가게를 차리고 키웠다. 서울 광장시장 포목상도 1세대는 대개 이북 출신이었고, 사라지기 전 서울 청계천시장에도 '○○아바이'식의 간판은 흔했다. 원래가 척박한 고장 출신들이어서 생활력은 타고났다. 조선시대부터 조정의 보호를 받던 서울상인(京商ㆍ경상)에 맞서 보부행상으로 전국을 누비며 상권을 장악했던 개성, 황해도상인들의 악착같은 상인정신도 남한 시장에서 빛을 발했다.
■ 이북출신이 창업한 기업 중에 샘표식품을 비롯해 대개 식품과 유통업, 소규모 소비재 분야에서 작지만 알짜배기 강소(强小)기업이 유난히 많은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어쨌든 예전 1980년대 이전까지 모두가 어렵던 시절에도 '이북 출신'하면 굶는 집은 아니겠거니 하던 이미지는 이런 맨몸의 바닥정신에서 생겨났다. 실향민 출신의 이 알짜배기 부자들이 하나 둘 타계하면서 예상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북에 남겨둔 자식들이 남쪽 새어머니와 이복형제들을 상대로 아버지의 유산을 나눠달라는 소송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 북의 형제 4명이 100억 원대 유산분할 소송을 제기, 최근 법원의 조정결정을 받아낸 데 이어 또 다른 북 남성이 수십억 원대 유산분할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북한 당국이 소송을 주도한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등 상황은 더욱 어지럽다. 동서 분할 당시 주민이주가 제한적이었고 상시 교류도 이뤄졌던 독일에선 별 문제되지 않았던 일이다. 이 뿐 아니다. 실정법상 북한 자녀의 상속이 정당하듯, 통일 후 남쪽 주민의 북한 토지소유권 주장도 현행법으론 막기 어렵다. 한가해 보이던 통일법제의 필요성이 급속히 현실로 다가드는 느낌이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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