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랑한 종소리에 제비들이 날아오르면서 바닷가에 눈부시게 우뚝 선 도시 오멜라스의 여름축제는 시작되었다." 여류 SF 작가 어슐라 르 귄이 쓴 소설 에 나오는 오멜라스는 축복받은 도시다. 모두가 즐거워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이곳에 한 가지 비밀이 있다.
어느 아름다운 건물 지하에 창문도 없고 문은 굳게 잠긴 방이 있다. 이 방에는 어린아이 하나가 있다. 공포와 영양실조로 너무나도 야윈 아이는 살이라곤 아예 없고 배만 불뚝 튀어나왔다. 정신박약인 이 아이는 말한다. "전 좋아질 거예요. 절 내보내주세요."
오멜라스 사람들은 아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다 안다. 분노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이 비참한 아이를 위해 뭔가 해주고 싶어하기도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지금껏 누렸던 모든 행복과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만다. 그것이 계약인 것이다. 단 한 가지 사소한 개선을 위해 오멜라스에 사는 모든 이들이 누리는 멋지고 고상한 삶을 내던져 버려야 한다는 것, 그것이 지하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죄악을 방기하게 만드는 이유인 것이다.
이 소설의 결말은 놀라운 반전이다. 지하실의 아이를 본 뒤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에 차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청소년들이 나온다. 하루나 이틀쯤 침묵에 잠겨 있다가 집을 떠나는 나이든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오멜라스를 떠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작가는 그러면서 양심의 딜레마를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낙원이 제공된다면, 그리고 어느 외딴 곳에서 길 잃은 한 영혼만 고통을 당하면 그 낙원에 있는 수백만 명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설사 그런 식으로 제공되는 행복을 붙잡고 싶은 충동이 우리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렇게 얻은 행복이 얼마나 추잡한가를 스스로 명확히 느끼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정리해고 일상화 된 잘못된 시장
사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다른 사람들의 일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세계화와 자유시장은 모두에게 풍요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 더 부유해진 사람도 있지만 불평등은 훨씬 더 심해졌다. 기업 경쟁력을 높여 이익은 늘고 주가도 올랐지만 정리해고는 일상화됐다. 적자도 아닌데 연례행사처럼 감원을 단행한다. 정치인과 기업인들은 고용 창출을 다짐하면서도 자신의 재임기간 중 인력을 얼마나 줄여 생산성을 얼마나 높였는지 자랑한다.
하기야 자본주의 아래서 기업의 목적은 이윤 극대화요, 그 목표는 주주가치 극대화다. 1600년에 출범한 영국의 동인도회사 이래 현재 우리나라 대기업들까지 다 그렇다. 기업이 살아야 근로자도 산다고 강조한다. 회사가 망한다는데 구조조정에 동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수백, 수천 명의 정리해고에도 무감각해졌다. 게다가 열심히 일하고 재테크 잘해서 부자 되는 게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도 가시처럼 걸리는 게 있다. 단 1명을 해고한다 해도 여기에는 피눈물 나는 사연이 숨어있다. 해고 통보는 곧 추방을 의미한다. 추방당한 사람은 자기 자신 때문에 우는 게 아니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이들을 안심시켜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동안 자랑스러운 아버지였고 믿음직한 남편이었으며 든든한 자식이었는데, 어느날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됐을 때의 그 절망감을 어찌 입밖에 낼 수 있겠는가. 아침 조회 때마다 공장 마당에서 '소금꽃나무'가 되어 서있었어도 다 견뎌냈는데, 이 무력함과 참담함은 도저히 견뎌낼 수 없다.
버스 타는 국민 늘게 해선 안 돼
이윤 극대화가 목표고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기업이란 허구의 장치다. 제도가 만들어낸 수단일 뿐이다. 수단은 결코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수단이 목적으로 변하면 괴물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에 차서 혹은 침묵을 지키다 하나씩 자본의 편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서라도 말이다.
박정태 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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