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아서 코난 도일 등 지음·정태원 옮김/비채 발행·700쪽·2만4,000원
"나에게 문제를 던져 주게. 가장 난해한 암호, 가장 복잡한 분석 과제를 던져 주게. 나는 무미건조한 일상을 혐오하네."
1891년 6월 영국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이 대중월간지 '스트랜드 매거진'에 '셜록 홈스의 모험'이라는 추리소설 연재를 시작했다. 매달 1편씩 1년 동안 이어진 이 연재의 시작은 100년여 현대 추리소설사에서 가장 널리 그리고 가장 뚜렷이 대중에게 각인될 명탐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자신감 넘치는 저 대사가 자만이나 허풍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도일의 숱한 장ㆍ단편 속에서 홈스는 천재였다. 연재를 마감하면서 도일이 홈스를 죽는 것으로 설정하자 팬들이 작품 속 홈스의 거처(런던 베이커가 221번지 B호)로 몰려들어 살려내라고 시위를 벌일 정도(결국 다시 살려내고 말았다)로 추앙 받았다.
홈스의 출현은 세계적으로 추리소설이 만개할 첫 단추를 끼웠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작지 않다. 홈스로 영국이 흥분한 뒤 프랑스에서, 또 미국에서, 시간차를 두고 일본에서 추리소설 붐이 일었다. 명탐정이 천재적인 범죄자를 배출했다는 건 앞뒤가 뒤바뀐 얘기지만 괴도 뤼팽의 출현은 프랑스로까지 전해진 홈스의 인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홈스의 성공에 힘입어 영국에서는 1900년을 전후한 시기 명탐정의 활약에 무게중심을 둔 단편 추리소설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 은 이 시기 홈스 못지않은 추리력과 개성으로 미궁에 빠질 듯한 사건들을 하나하나 해결해가는 이야기를 그린 다른 영국 추리작가들의 단편을 모은 책이다. 단행본을 옮긴 것이 아니라 작품을 번역한 추리소설 전문가 정태원씨가 당시 영국 대중잡지에 실린 단편들 중에서 직접 엄선해 편집했다. 셜록>
아서 모리슨, 배러니스 에뮤스카 오르치, 브레트 하트, 캐서린 루이자 퍼키스, 클리포드 애시다운, 어네스트 윌리엄 호넝, 그랜트 앨런, 재크 푸트렐…. 책에 실린 30편 작품의 작가 9명은 아서 코난 도일을 제외하면 대부분 낯설다. 하지만 "이리저리 꼬는 복잡한 구성인 요즘 장편 추리소설에 비하면 단순하면서도 묘한 매력을 지녔다"(박광규 계간 미스터리 편집장)는 평처럼 모처럼 정통추리소설의 '클래식'한 맛을 보려는 사람들을 결코 배신하지 않을 이야기의 연속이다.
홈스 만큼은 아니어도 당시 인기가 있었던 탐정 마틴 휴이트가 등장하는 아서 모리슨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포갯 살인사건'은 화자인 기자와 휴이트가 사는 낡은 건물 꼭대기층의 방 4개짜리 숙소에 세 든 포갯이라는 중년 남자 살인사건 이야기. 어느 날 저녁 독신자치고는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포갯의 방에서 총 소리가 나고 가정부와 함께 방에 들어선 휴이트는 포갯이 머리에 총을 맞고 의자에 앉은 채 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방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창문으로는 누가 침입한 흔적도 없다. 살인범은 누굴까. 자살인가.
이렇다 할 자살 동기를 찾지 못한 경찰 등은 결국 포갯이 사고로 숨졌다고 보고 사건을 종결한다. 하지만 휴이트의 생각은 달랐다. 포갯의 방은 창문 아래로만 쳐다보면 달아날 방법이 없지만 지붕으로 올라가는 건 키 큰 남자라면 가능한데다 범행 현장에 포갯의 것이 아닌 이 자국이 난 사과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포갯 주변에서 범인을 찾아 나선 휴이트는 유력한 혐의자를 지목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럴 수가. 그에게는 포갯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일본의 인기 형사드라마 '아이보우(相棒)'의 스기시타(杉下) 경감 같았으면 "당신의 살의를 비난할 순 없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은 용서할 수 없다"라며 끝까지 추적했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휴이트는 '당신이라 해도 결코 찾아내지 못할 곳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편지를 남긴 범인을 더 이상 쫓지 않는다.
여성작가 오르치는 레스토랑 구석 자리에서 식사나 디저트를 마치고 늘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석의 노인'이라는 새로운 탐정상을 선보인다. '하루 24시간 어떻게 살 것인가' 같은 자기계발서로 이름이 알려진 아널드 베넷의 '런던의 불'이라는 단편도 맛 볼 수 있다. 철저한 논리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생각하는 기계' 밴 듀슨 교수, 뤼팽의 모델인 괴도 래플스, 최고의 홈스 패러디라는 칭찬을 받은 헴록 존스 탐정, 희대의 사기꾼 클레이 대령 등 명탐정과 범죄자들의 이야기가 당시 그려진 70여 컷의 삽화와 함께 흥미진진하게 펼쳐져 있다.
번역자 정태원씨는 국내에서 추리문학의 전도사 역할을 한 유명한 '셜록키언'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모리스 르블랑의 <기암성> 에 반해 추리소설의 세계에 빠져든 그는 국내 번역된 책을 다 읽은 것으로 모자라 영어, 일본어를 공부해 직접 해외 원서를 탐독했고 이를 번역해 소개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년간 투병해온 암으로 지난달 54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책은 누구보다 미스터리 문학을 사랑한 정씨가 국내 독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다. 기암성>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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