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분명 쾌거다. 그것도 초대형이다. 세계 화장품 시장을 한 손에 쥐락펴락하는 유수 회사에서 한국지사 직원이 기획한 제품이 세계 시장에 출시돼 초대박을 쳤으니 말이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니 쾌거랄밖에. 이 대형 사건의 주인공은 ELCA코리아 크리니크 디비전의 브랜드 매니저 차현숙(48) 전무. 그가 창조해 낸 크리니크의 안티에이징 에센스 '리페어웨어 레이저 포커스 링클 & 포토 데미지 코렉터'는 회사에서 그의 영문 이름을 따 '제니 에센스'라고 불린다.
하지만 꿀처럼 달달한 성공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2006년 같은 그룹 브랜드인 맥에서 크리니크로 옮겨온 차씨는 이 화장품 브랜드가 지나치게 베이식 케어와 여드름 관리 같은 맞춤형 케어에 함몰돼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시아, 특히 이 시장을 주도하는 한국에서의 화두인 안티에이징(노화 방지)이었다. 그리고 아이템은 에센스. 이 역시 한국에서 시장 점유율이 고공 행진 중이었다.
차씨는 제품의 구체안도 속속 확정해 갔다. "시중에 나와 있는 안티에이징 에센스를 하나하나 섭렵하면서 느낀 것들을 정리했죠. 그랬더니 결실이 나오더라고요." 우선 용기는 다른 제품의 경우 펌프형이어서 누르기 불편한 점을 고려해 스포이트형으로 하기로 했다. 스포이트형은 의약제품을 연상시켜 신뢰도를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 다만 스포이트는 용기 바닥 양옆까지 닿지 않기 때문에 끝을 휘게 하는 방안을 생각해 냈다. 에센스의 질감은 너무 무르지도 진득하지도 않게 하기로 했고, 색깔은 영양이 듬뿍 담긴 느낌을 주기 위해 투명하면서도 유백색을 띠도록 했다.
밑그림이 그려지자 차씨는 2007년 뉴욕 본사에 연락을 취해 개발부사장과 만났다. "안티에이징 에센스라는 말을 꺼냈더니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이더라고요. 사실 서구에선 이런 거 안 쓰거든요. '한국과 아시아에서 인기가 있는 아이템인데 우리도 만들어야 한다. 서구에서도 통할 것이다'라고 설득하긴 했는데 뭐 반응이 그랬어요." 차씨는 좋은 아이디어지만 기존 자사 브랜드 제품들과 잘 안 맞는다는 허망한 대답만 듣고는 뒤통수를 치며 귀국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까맣게 잊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하지만 노력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던가, 2008년, 대반전이 그를 문득 방문했다. "크리니크는 상품 출시 2년 전에 각국 마케팅 담당자들을 불러 신제품 설명회를 하는데 거기 갔더니 낯익은 게 있는 거예요. 바로 제 제품이었어요. 발표자가 '제니 에센스'라며 미소를 던지더군요."
제품은 개발팀이 만들었는데 자외선에 계속 노출되면서 생기는 피부 손상(솔라 스카)을 없애 주는 효소 복합체, 피부를 팽팽하게 하는 콜라겐의 생성을 촉진시키는 펩타이드 복합체, 피부 손상을 방지하는 항산화 칵테일로 구성돼 있었다. 제품의 질감, 색상, 용기도 차씨가 요구한 대로 제대로 쫙 빠졌다.
테스트 후 이 제품은 2010년 마침내 시장에 선보였다. 제품이 나오자 차씨는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회사에는 "전 세계적인 히트 상품이 될 것"이라고 큰 소리 팍팍 쳤는데 잘 안 팔릴까봐 걱정이 컸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초기부터 엄청나게 팔려 나간 것이다. "회사 매출액의 7%를 이 제품이 올렸는데 지금까지 이 추세가 이어지고 있어요. 싱글 아이템 가운데 사내 2위죠.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비슷하고요."
차씨는 1987년 아모레화장품에 입사한 이후 잠깐 전업주부로 일한 2년을 제외하고 22년을 화장품에 바친 사람이다. "연세대 영문학과 졸업 후 교수님 추천으로 아모레화장품에 들어갔는데 화장품은 대학 때도 거의 써 보지 않았을 정도로 무관심 그 자체였어요. 그런데 일해 보니까 매력이 있어요. 이게 패션, 엔터테인먼트, 마케팅, 홍보와 다 연관이 돼요. 이 '무한 확산형 경험'에 푹 빠져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지냈네요."
그는 엄청난 성공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성격이라면 성격이고, 신념이라면 신념이다. "2탄, 3탄? 당연히 만들어야죠. 그래서 메이크업과 클렌징 분야를 만지작거리고 있어요. 모두 크리니크의 대표 분야인데 한국에서는 맥을 못 춰요. 새롭게 저질러 볼 작정이에요."
이은호 선임기자 leeeunho@hk.co.kr
사진 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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