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잠시 있는 동안 수차례 겪은 폭우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늘이 잠시 흐려지는가 싶다가 순식간에 퍼부어대는 비는 우산도 소용없이 금세 온몸을 물범벅으로 만들었다. 눈 역시 한번 내렸다 하면 무릎까지 올라오기 예사였다. 도시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허리케인은 우리의 태풍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토네이도가 집을 날리고 달리는 차까지 휘두르는 영화 같은 실제상황이 수시로 TV에 방영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터라 자연의 위력을 새삼 확인했고, 그래서 은근한 우리의 날씨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었다.
■ 그러나 이번 비를 겪으면서 우리 역시 비 오는 날 연인과의 데이트나 삼겹살에 소주를 생각할 그런 낭만적 비가 더 이상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 퍼부어대는 비의 양도 처음이거니와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3일 내리 밤잠을 못 이룬 것 역시 처음이다. 뉴 미디어 덕에 실제 산사태 상황을 생중계하듯 봤고 물구덩이에 빠진 6,000대 이상의 차량이 한꺼번에 견인차에 실릴 처지에 놓인 정도다. 104년 만의 폭우라니 당연한 일이지만 전례 없는 태풍의 진로나 최근 잇달아 발생한 회오리바람 등을 보면 우리 기상환경은 분명 엄청나게 달라졌다.
■ 이같은 기상이변에 대해 전문가들은 여러 분석을 내놓는다. 장마 뒤끝의 폭우를 두고 우리나라가 아열대 기후에 접어들었다는 견해가 가장 주목된다. 기상청의 장마종료 선언 이후에도 게릴라성 호우가 쏟아져 장마 대신 우기라는 개념을 도입하자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우기란 열대나 아열대지방에서 비가 집중적으로 오는 시기. 우리나라에서도 장마와 무관하게 폭우가 잦아진 만큼 여름 전체를 우기로 지정해 집중 관리하자는 것이다. 3일 이상 이어진 이번 비는 어쨌든 고온다습한 정체 기류와 건조한 공기의 충돌로 불안정해진 한반도 대기가 만들어낸 현상이다.
■ 요즘 우리 경제가 불안한 한반도 대기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미치면 아찔하다. 재차 확인된 성장률 둔화와 여전한 취업난, 치솟는 전세가와 가계부채 등은 물을 흠씬 머금은 산과 같다. 빈부차는 물론 대기업의 횡포에 치인 중소기업의 불만은 웬만한 비에도 무너져 내릴 지경이다. 아슬아슬한 미국상황과 악화 일로의 유럽 경제사정은 우리의 불안정 기류와 금세라도 충돌할 기세다. 일부 업종의 수출 호조로 힘겹게 버티는 상황에서 몇몇 기업의 사상최대 이익, 개선된 산업활동 동향지수 등 그나마 다행스런 몇몇 수치가 우리 경제의 착시를 몰고 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종재 논설위원 jchong77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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