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전 수해로 방앗간이 통째로 사라졌어요. 쌀도 다 떠내려가고 앞이 깜깜했죠. 그때 도우러 왔던 분들이 얼마나 고맙던지…."
29일 경기 광주시 송정동 수해현장. 19년 전 경기 안성시 고삼면에 살았던 최승열(60)씨는 당시 동생이 운영하던 방앗간이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집이 침수됐던 악몽을 떠올렸다. 최씨는 "하늘이 원망스러웠지만 군인, 경찰관,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었다. 이번에 수해를 입은 이웃들에게도 재기의 희망을 주고 싶다"고 이곳으로 달려 온 이유를 밝혔다.
700㎜가 넘는 폭우로 1,000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한 이곳에 특별한 봉사자들이 찾아왔다. 누런 토사를 뒤집어 쓴 그릇을 닦는 모습은 여느 봉사자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들이 수해 현장을 대하는 마음은 남달랐다. 수해로 생활터전을 잃은 기억이 아직 생생하기 때문이다. 이날 송정동 수해현장을 찾은 안성시새마을협의회 회원 중에는 최씨처럼 과거 수해 피해로 고생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10여명에 달했다.
수마가 할퀴고 간 처참한 현장에는 남의 일을 제 일처럼 여기고 달려온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이들은 산사태 현장에서 토사를 퍼내고, 수재민의 더러워진 옷가지를 빨고, 봉사자들을 위한 밥을 지으며 고통을 나눴다.
서울시 자원봉사센터에 따르면 서울에서만도 29일까지 봉사자가 약 4,000여명에 이르렀다. 토ㆍ일 신청자까지 포함하면 주말까지 자원봉사자는 1만명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트위터와 블로그 상에서 봉사자들을 모집하는 글도 시시각각 늘어나고 있다.
방학 맞아 학생들 전국에서 출동
학생들도 수해 복구에 팔을 걷었다. 경기 양주시 둥지지역아동센터에는 오전7시에 대구에서 출발한 학생 지원군들이 도착했다. 김한결(17)군은 "아이들이 공부할 곳을 잃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 보충수업도 빼먹고 달려왔다"면서 "대구에는 비가 안 와서 몰랐는데, 현장에 도착해서 보니 처참했다"고 말했다.
인근 지역의 저소득가정 자녀들을 중심으로 약 30여명이 공부하는 이곳은 27일 침수됐으나 주민들의 피해가 워낙 커서 이틀이 지나도록 복구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에 김군을 비롯한 학생들은 아침부터 해 질 때까지 젖은 책과 전자제품, 집기들을 밖에 내다 놓고, 물로 바닥을 청소하느라 땀을 쏟았다. 김군은 "내 손으로 어느 정도 정리된 모습을 보니 뿌듯하지만 약 30여명의 아이들이 공부하는 이곳에 책이 텅텅 비었고, 피아노도 못쓰게 돼 앞으로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공무원시험 준비생인 박병수(28)씨는 면접 스터디를 준비하는 친구 5명과 함께 형촌마을을 찾았다. 박씨는 "책상에서 면접 준비를 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봉사하는 것이 더 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에 왔는데, 현장 지휘자가 군대 선임보다 무서웠다"며 웃었다.
평일이면 어때, 직장인도 한마음
평일인데도 복구 현장에는 직장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기업의 단체지원도 있었지만 풀뿌리 차원의 참여는 이를 능가했다.
우면산 산사태로 피해가 컸던 서울 서초구 우면동 형촌마을에는 2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장화를 신고 흙투성이 작업복을 입은 채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영어강사 최선영(36)씨는 "새벽강의를 마치고 저녁 강의 전까지 봉사하러 왔다"며 "토사를 퍼내고 잔여물 등을 날랐는데, 가족사진이나 앨범이 진흙에 묻은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같은 곳에서 빨래ㆍ설거지에 녹초가 된 홍지민(28ㆍ회사원)씨와 이동혁(27ㆍ대학생) 커플은 "태안 기름유출 때 못 간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려 봉사에 참여하게 됐다"며 "부촌이라지만 반지하에 세 들어 사는 서민들의 집이 특히 피해가 컸던 게 안쓰럽다"고 했다.
아직도 태부족… 다양한 도움 절실
피해 규모에 비하면 아직도 도움의 손길은 턱없이 부족하다. 산사태로 6명의 사망자를 낸 서울 방배동 남태령 전원마을에서 세탁봉사를 맡은 대학생 최영주(20)씨는 "주변을 정리하다가 몸에 상처가 난 사람들이 많은데, 제대로 치료조차 못하는 상황"이라며 의료구호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서울시 자원봉사센터 관계자는 "오늘도 한강 인근에서 구호 요청이 들어오는 등 갈수록 피해지역이 늘어난다"며 "더 많은 봉사자들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이정현기자 johnlee@hk.co.kr
정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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